[시론/서해성] 들어라 바람벽에 우짖는 눈물을

찢겨나간 헌법 첫줄 어디에.. 응답하라 ‘현재’

서해성 소설가(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페이스북(서해성)'
서해성 소설가(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페이스북(서해성)'

2013년은 ‘응답하라’와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중언어로 압축할 수 있다. 시대는 말로 규정되고 말로 존립하다 말과 함께 사라진다. 대중사회에 유통되는 언어는 영화나 범죄유형과 더불어 당대 대중의 거울이다. 영화 “관상”에 관객이 몰린 것도 이를 방증한다. 예측 불가능 사회에서 대중은 계량할 수 없는 점복이나 기복적 주술에 의존하게 된다. 이는 성형사회와 조응하고 있다. 얼굴 성형시장은 한국 자본사회에서 개별적 신분상승에 대한 열망과 그에 따른 불안의 크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떠도는 불안.. 바람벽 벽서로 만난 까닭

‘응답’과 ‘안녕’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건 불안이다.

‘응답하라’는 간절한 요청형이다. 모스 부호와 흡사한 이는 아무리 호출해도 안전한 과거를 향해 대답을 불러내고 있다. 이 청춘세대가 현재를 향해 평어체 질문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타인의 안부를 통해 자신의 안부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 세밑을 달구고 있는 ‘안녕들하십니까’이다. 호출할 수 없는 존재나, 호출당하지 않는 존재는 세상에 인증되지 않는 비극적 존재다. 불응의 사회, 안부 없는 사회에 대한 자기 불안과 사회 불안이 문득 바람벽에서 벽서로 만나게 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신분상승 몰입 세대.. 시장논리에 압제된 오늘

이 호출에 응해 격하게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이들은 성장기에 민주정권을 거쳤으되 저마다 개별자로 신분상승에 몰입해왔다. 그 과정에서 IMF 등 신자유주의를 만나 이른바 ‘스펙’이라고 부르는 괴이한 시장논리에 포섭되고 강제당해야 했다. 이전 세대가 독재라는 권위주의 정권에 주눅 들었다면 이들은 자본에 압제당하고 있는 것이다.

벽서.. ‘잃어버린 민주, 얻은 불안, 빼앗긴 미래’

전봇대와 거리로 이어지고 있는 대자보라는 연쇄적 벽서는 목메어 불러도 ‘응답 없는 너’에 대한 환멸을 이기고자 하는 몸짓이다. 그 요지는 정작 불온한 것은 ‘종북’이 아니라 자본과 권력의 공모라는 것을 공유하기에 이른 것이다. 정치적 문제에 짐짓 한 걸음 떨어져 있었던 그들이 오늘 깨닫고 있는 것은 ‘잃어버린 것은 민주주의요, 얻은 것은 불안이고, 빼앗긴 것은 미래다’는 사태인식이다. 요컨대 민주적 정치권력 없이 홀로 발버둥치는 일로는 자기 문제를 종국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데 다다른 것이다.

몰상식 판치는 세상.. 벽서 통해 문제 공감

벽서의 배후를 이루는 것은 우선 민주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붕괴를 꼽을 수 있다. 정확하게 1년 전 오늘 헌법의 순결마저 무너진 민주주의 후퇴 상황 아래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식붕괴 지형에 대한 성찰 없이 온전한 현재와 미래 또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천년 이상 불러온 민요 ‘아리랑’마저 국방부에서 불온곡으로 지정하는 판국이란 몰상식을 넘어 광기가 몰아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다. 청춘세대들은 익히 알고 있던 이 문제들을 벽서가 나붙던 날 자기 문제로 치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안하다 정의야’.. 남의 울부짖음에 열린 귀

이는 충분히 곪아 있던 화농이 터진 격이지 결코 난데없는 현상이 아니다. 여기에 사회에 대한 침묵과 외면해온 정의에 대한 미안함이 함께 동반하고 있다. 자본 약탈의 일상화도 뺄 수 없다. 일자리조차 보장 못하는 자본권력은 자신들의 권세와 이익에만 몰두할 뿐 이들에게 응답해오지 않았다. 미래를 차압당할 수 있다는 위기를 인정하자 비로소 밀양 송전탑과 철로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사회적 청각을 발동시키자는 제안에 이들은 안부 묻는 행위를 통해 타인의 뜻을 구하고 있다.

침묵 동조 세대.. 내 안녕 얼마나 위험한가 동의

벽서의 개인적 배후는, 성적(성장기를 지배하는 입시와 스펙), 돈(탐욕을 넘는 약탈적 약육강식만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느끼는 공동체 위기), 권력(헌정 훼손), 사회(몰상식), 일상(명품 등)의 굴종을 들 수 있다. 출세와 탐욕의 정당화로, 때로 침묵으로 동조해오던 세대들이 공범의식에 대한 자각을 넘어 나의 평안한 안녕이 실은 얼마나 손쉽게 무너질 수 있는가, 위험한가에 동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눈높이 고백, 손때 묻은 ‘실명’ 진실의 힘

벽서 형식은 현 세대에게는 새롭게 보일 수 있으나 사실 과거에 넘쳐났던 방식이다. 당시에는 언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견과 사실을 알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은 유인물과 대자보뿐이었다. 민주화운동시기의 표현방식이 소통불능의 현실을 강타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오늘 벽서는 이와 분명히 다르다. 우선 자신의 눈높이에서 쓴 소박한 소통방식이라는 민주성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고 볼 수 있다. 벽서의 언어는 평범한 일상어로 슬로건이 결코 아니라는 점, 누구에게 강요하지 않는 자기 고백형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공해라 부를 정도로 정보가 과잉된 디지털 시대에 손 글씨로 쓴 아날로그의 손때 묻은 진실이라는 점 또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는 디지털 시대를 거스르는 행위인데 전파와 유통방식은 다시 SNS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 행위에 동참하는 재생산 과정은 당당하고 공명정대한 실명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무너진 공적 영역, 빈 벽 메운 벽서.. ‘사회적 난로’

무너진 공적 영역을 채우기라도 할 듯 벽서는 바람벽 빈자리를 메우면서 외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타인의 세상을 나의 세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청춘세대들이 개별적 고립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말문이 열리고 있다는 명징한 증거이자 하나의 사태다.

벽서 현상은 이와 같이 안팎의 조건과 어우러지면서 2013년 세밑 한국사회를 진실의 힘으로 작동시키고 있다. 긴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사회적 난로를 장만한 셈이다.

응답 없는 사회.. 울부짖는 바람벽 글씨들

올해 내내 한국의 대중은 권력에 응답을 요구해왔다. 그들은 한낱 ‘1994’가 아니라 대선을 통해 왜곡된 공화정과 헌법 체제의 안부를 물었고, 공공영역의 안부와 고통 받고 있는 약자들의 안부를 물어왔다. 어디에서도 응답은 없었다.

마침내 오늘 바람벽이 말하고 있다. 바람벽의 글씨들이 울고 있다. 그리하여 가장 평범한 안부 인사에 대중은 전율하고 있다. ‘안녕들하십니까.’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는 광범한 불안에 대한 소박한 질문이 대중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대자보는 불안한 눈물의 향연이다.

찢겨나간 헌법 첫줄 어디에.. 응답하라 ‘현재’

‘응답하라’와 ‘안녕들하십니까’. 오늘은 정치와 자본 권력이 누누이 말해온 바로 그 내일이다. 그러므로 과거에게 응답하라고 요청하지 말고 현재와 미래에게 물어야 한다. 나눠먹는다던 입맛 당기는 커다란 파이는 어디에 있는가. 낙수효과는 왜 안 나타나는가. 알다시피 그것은 다 거짓말이었다. 작년 오늘, 정확히 365일 전 찢겨나간 헌법 첫 줄은 어디 숨어서 혼자 팥죽을 퍼먹고 있는가. 저 바람벽이 울고 있다. 이제 현재가 답할 차례다.  

‣ 12.19 ‘데일리 고발뉴스’, 서해성의 <3분직설> (14분58초~)

[편집자註] 서해성 교수의 ‘시론’은 매주 목요일 뉴스독립군 <고발뉴스>를 통해 방송되는 ‘서해성의 3분 직설’을 통해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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