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민치일’.. 잊으면 10월17일 다시 온다”
역사 잊는 대중은 스스로를 배신해
“그날 저녁 민주주의는 정지되었다”
그날 저녁 7시 한국 민주주주의의 심장은 정지되었다. 시인 양성우는 이를 ‘겨울 공화국’이라고 서슴없이 말했고 시집은 빼앗겼다. 사람들은 숨은 곳에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외고 노래했다. 그 한 대목, ‘민·주·주·의·여, 만세!’는 광야처럼 늘 가슴 깊이 울려 퍼졌다. 노래는 자기 안에서만이라도 크게 들리기를 바라는 눈물 젖은 기도였다. 노래는 노래 자신을 스스로 사랑한다는 걸 한국인이 그때처럼 절박하게 깨달은 적은 없었다.
“못다 부른 노래는 골목을 배회하고..”
그날로 노래가 위대한 시대가 닥쳐왔다. 서정시는 사랑으로 뜨거워야 했지만 이 땅의 시들은 어디서나 못 다 부른 노래가 되어 골목 사이를 배회해야 했다. 그가 가고 싶은 곳은 광장이었지만 하물며 바람벽 한쪽에도 분필로 ‘민주주의’ 네 글자를 쓸 자리가 없었다. 거기에는 동원사회의 구호가 가득했다. 백묵으로 허공에 쓰는 투명한 붓질, 아무리 휘갈겨도 그건 흰 먹일 뿐 새겨지질 않았다. 공화국이 아닌 허공은 글씨 몇 자조차 받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걸 말하고 쓰면 무기징역 또는 사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빗방울도 차렷 자세.. 착검한 시월이여”
그리하여 양성우는 틀렸다. 그건 ‘겨울 공화국’이 아니었다. 공화국이 아니라는 걸 목 놓아 외치는 이 말마저 차라리 공화국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날 저녁 7시, 군인들이 광장에 나타나고 모든 골목은 수상해지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심이 잉크처럼 퍼지고 노래도, 한 잔 맥주도, 기타 소리도, 빗방울도 차렷 자세를 한 채 수직으로 떨어져 내려야 했다. 시월은 그렇게 착검을 한 채 일상으로 강하했다. 이 산천은 깊은 가을인데도 녹색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제복을 입은 녹색 가을은 열을 지어 뛰어왔다. 비상계엄령.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유신시작”
시월에는 개천절만 있는 게 아니다. 시월에는 한글날만 있는 것도 아니다. 시월에는 10월 17일이 있다. 이 땅에서 민주주의가 사살된 날이다. 바로 오늘이 1972년 비상계엄령이 내리고 유신이 시작된 날이다. 대통령은 ‘특별선언’을 발표해 자기에 맞게 만들고 또 뜯어고친 기존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국회를 해산했다. 헌법 정지와 국회 해산은 결코 문자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건 근대 이래 형성된 모든 사회적 생명에 대한 파괴를 선언하는 일이다.
“90% 넘는 유신헌법 찬성.. 공포의 비율”
뒤이은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유신헌법은 91.9% 투표율에 91.5% 찬성률로 통과 당했다. 90% 지지라는 건 얼마든지 거짓일 수가 있었다. 투표 동원과 찬성 동원이라는 강압에 이끌려나간 자기 의지가 박멸된 ‘주권자’는 투표함 내부마저 믿을 수가 없었다. 이 투표율은 폭압 권력에 대한 굴복을 뜻하는 절차로 당시 대중이 느낀 공포의 비율을 나타내는 숫자였을 뿐이다. 세계 역사상 다수결이라는 숫자가 이처럼 모멸적인 적은 없었다.
“반대없는 체육관 투표.. 박정희 다시 당선”
12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통대(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 중 2357명이 단독 후보에게 투표했다. 단 두 표만이 반대도 아닌 무효했다. 두 표 빠진 100%, 이는 투표장에서 잘못 기표하는 등 일어날 수 있는 확률보다 분명히 낮은 것이었다. 그 두 표를 차라리 양심에 따른 행위라고 믿고 싶었던 게 한국인들의 심정이었다.
“오늘은 ‘민치일’.. 잊으면 10월17일 다시 온다”
1인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시월은 그 두 표 사이로 제 얼굴을 가리면서 왔다. 오늘이 그날이다. 역사를 잊는 대중은 결국 스스로를 배신하는 법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 8월 29일이 국치일이라면 1972년 10월 17일은 민치일이다. 일제와 독재를 포함해 역사는 기억하는 것으로 용서하지 않는 일을 말한다. 치욕을 용서하지 않는 자만이 일어설 수가 있다. 그렇지 않을 때 10월 17일은 또 반복되고 작은 10월 17일이 날마다 반복되기 때문이다.
[편집자註] 서해성 교수의 ‘시론’은 매주 목요일 ‘데일리 고발뉴스’를 통해 방송되는 ‘서해성의 3분 직설’을 통해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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