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서해성] 국가 권력은 망각할 자유가 없다

망각으로 도망치는 기억.. 뒤쫓는 진실과 정의

국가 권력은 망각할 자유가 없다

서해성 소설가(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페이스북(서해성)'
서해성 소설가(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페이스북(서해성)'

“기억 나지 않는다”.. 생생한 ‘기억’ 반증

1988년 광주청문회가 열렸을 때 발포와 관련한 선상에 있던 증인들의 증언은 후렴이 같았다.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국민을 학살한 군대 지휘자나 명령 계통에 있던 자들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들은 대낮에 거리에서 시민을 총으로 쏘아죽이고 정치적 반대자이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예비검속으로 투옥시킨 장본인들이었다. 죄 없는 보통 사람들을 재판은커녕 최소한의 형식적 절차조차 없이 사회정화위원회라는 일상적 인권압살기구를 통해 삼청교육대에 끌고 가고, 학생들을 고문하고 또 살해하던 그 자들이 국민이 보는 TV 앞에서 자못 어리숙한 표정으로 능청을 떨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는 도리어 가장 생생히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역설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망각으로 도망치는 기억.. 뒤쫓는 진실과 정의

그들의 언설은 국민에게 망각을 강요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망각으로써 명백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할수록 도리어 진실과 정의에서 그 망각은 기억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피해자의 증언과 다른 기록으로 이윽고 복원되어갔다.

독재자의 망각에 날아든 노무현의 명패

그들의 의도된 망각에서 국민이 느낀 것은 단지 희극이 아니라 권력의 파렴치한 망각에 대한 분노였다.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망각의 지점에서 그들은 가장 반인륜적 행위를 자행했기에 공동 피해자인 국민의 상실감은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 초년생 노무현은 이 망각과 묵비권을 향해, 전두환의 망실된 언행에 대해 명패를 집어던졌던 것이다.

독재자.. 망각의 자유 없는 자들의 망각

그들은 12.12와 5.17이라는 두 번의 쿠데타와 광주학살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었다. 권력은 신군부라 부르는 군인들과 여기에 흡착한 관료세력, 대대로 독재에 빌붙어 살아오던 정치인들, 새로 등장한 군인 권력자들 입맛에 박자를 맞추던 언론인들이 독식하고 있었다. 이들의 집권은 우연이 아니었다. 모든 사회적, 정치적 관계를 접어 두더라도 그들은 이 사태를 애초부터 기획해서 진행했기에 구상, 실행, 권력 사유화라는 과정이 뚜렷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망각은 불가능했다. 이렇게 그들은 망각할 자유가 없음에도 망각을 읊조렸다.

권력자의 망각.. 역사 소멸이 진짜 목적

권력이나 권력자의 망각은 국가의 책무를 개인의 망각을 통해 개별화하고 공적 기억인 역사를 소멸시키고자 하는 의도다. 국가 권력기관은 사설 임무를 수행하는 흥신소나 심부름센터가 아니다.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뜻하지 않게 변고가 생긴다 하더라도 단절되지 않고 임무를 지속하는 것이 국가기관이 아닌 일반 회사에서도 상식이다. 간첩사건 증거조작 의혹과 관련해 국가정보기구 핵심 관련자가 자살 기도 뒤 기억을 상실했다는 말은 진실 회피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정보기관은 기억의 집합소.. “기억유기 자격없어”

설령 기억을 완전히 잃었다 해도 이 사건은 사사로이 도모한 일이 결코 아니다. 증거조작이라는 말은 이 사건이 고도의 기획과정을 거쳤음을 말해주는 것이자 기억 상실은 사태의 진실이 모종의 형태로 은폐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혹을 더 증폭시킬 따름이다. 솔직히 막장 드라마의 한 대목과 유사해서 쓴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무엇보다 그 자체로 기억의 집합소라고 할 수 있는 정보기관은 기억을 유기할 자격도, 기능조차도 없다고 봐야 한다.

“망각하는 그 지점이 바로 유죄의 심장”

이 참에 분명히 알아야 하는 건 국가는 기억을 망각할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세금 쓰는 곳에는 망각이 없어야 한다. 국가나 권력, 권력자가 망각을 권리로 착각하는 곳에 기록의 진실은 물론 사회정의는 멸실되고 만다. 이는 단지 간첩증거조작에 한정되는 일일 수 없다. 권력은 현재뿐 아니라 기억과 기록으로 감시, 비판, 평가 받아야 마땅하다. 글머리에 전두환 신군부의 망각을 언급한 까닭은 권력의 의도적인 망실적 사고를 지적코자 한 데 있다. 이 망각이 친일행위의 망각, 독재행위의 망각과 뿌리가 닿아 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망각이 무엇이었는지 뼈저리게 알아두어야 한다. 망각하는 그 지점이 바로 유죄의 심장이다.

‣ 4.10 <데일리 고발뉴스> 서해성의 3분직설 (9분 55초~)

[편집자註] 서해성 교수의 ‘시론’은 매주 목요일 뉴스독립군 <고발뉴스>를 통해 방송되는 ‘서해성의 3분 직설’을 통해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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