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아들에 남긴 유언.. “내가 잘못되면 반올림을 찾아가라”
아버지는 틈틈이 일기를 썼다. 컴퓨터 앞에 앉아 더듬더듬 자판을 두드렸던 아버지의 모습을 아들 손성배씨는 기억한다. 2009년 12월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백혈병을 진단 받았다. 아버지가 50살이 되던 해였다. 3년간의 고통스런 투병 기간을 견딘 아버지는 2012년 결국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9월 성배씨는 아버지의 삼우제가 끝나자마자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의 문을 두드렸다. “내가 잘못되면 반올림을 찾아가라”는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다. 성배씨는 아버지의 일기를 근거로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8년 전 딸 황유미씨가 남긴 일기장으로 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알린 황상기씨처럼 말이다.
성배씨의 이 같은 사연은 3일 <한겨레>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아버지 고 손경주씨(당시 사망 나이 53세)는 2003년 3월부터 삼성전자 반도체 화성·기흥공장의 생산·설비 유지 보수 업무를 맡는 협력업체에서 일했다.
유해물질 뒤집어 쓰고 근무.. 국소배기 장치 고장 잦아
“(화성공장) 12라인 초기 셋업 설치 시에는 품질 향상을 위하여 협력사 대표는 물론 관리소장도 8시간 이상 매일 상주하면서 관리함. 기존라인에 비해 좋다고는 하였지만 대부분 화공약품과 노출되는 가스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진행되었다.”
“3~4개월의 설비 셋업 기간 동안에는 유해물질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유해가스 집진과 배출기능을 하는 국소배기는 설비 셋업 시에는 초기에 설치되어 있지도 않았다.”, “최근에도 기존라인에 국소배기가 고장이 나거나, 국소배기 동작장치인 리모트 콘트롤이 고장이 나서 사용불가가 비일비재했다.”
손씨는 원청인 삼성반도체가 협력업체 직원들을 상대로 ‘갑질’을 하는 듯한 정황도 적었다. 정규직 직원과의 업무 분담을 두고 삼성 측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화성공장에서) 설비 유지 보수는 삼성의 현업 직원과 대부분 같이 수행하다가 노동부에서 문제를 제기하자 업무 영역을 엄격히 구분하려고 노력은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음.”
“(2004년 기흥공장 신규라인 설치 상황과 관련해) 현대자동차가 본사 직원과 협력사 직원 간에 오른쪽 바퀴 셋업은 현업이, 왼쪽은 협력사 직원이 하듯 삼성반도체 제조 공정도 마찬가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손씨는 백혈병 진단을 받은 뒤 골수 이식을 했다. 이후 건강이 회복되는 듯해 2010년 8월에 복직했지만 2010년 1월 재발해 7개월 뒤 숨졌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 수원지사는 지난해 10월 손씨의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관리직인 손씨가 현장에서 일하지 않아 유해화학물질 노출 수준이 낮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아들 성배씨는 지난 1월 근로복지공단에 재심을 청구했다. 성배씨는 <한겨례>와의 인터뷰에서 “아빠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원인 규명을)계속하라는 마음으로 일기를 남겨둔 것 같다 끝까지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협력업체 직원인 손씨가 삼성의 산재 인정을 받기 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황유미씨 등 삼성반도체 정규직 노동자 5명으로 시작한 산재 신청은 8년간 64명으로 늘었다. 반도체에서 LCD,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이중 산재가 인정된 이는 단 7명뿐이다. 손씨와 같은 협력업체 직원은 한명도 없다. 삼성은 지난 1월 직업병 피해자 문제를 논의하는 조정위원회에서 “협력사 직원은 도의적, 법률적 책임이 고용한 해당업체에 있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또 협력업체 직원은 이직 등이 잦아 인사, 근태 등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도 밝혔다.
성배씨는 4일 오후 2시 금속노조에서 열리는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 증언대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아버지의 일기도 가져간다. “삼성이 만든 작업 환경에서 삼성 직원과 같이 일한 아버지가 보상 범위에 포함되지 않느냐고 말할 겁니다. 그게 아버지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요?” 성배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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