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복지 스타트 단계라 새로운 복지 필요 없다? 말 안 되는 얘기”
최근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이른바 ‘증세 없는 복지’ 논란에 대해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가 “세금과 복지에 대한 기본 개념이 모두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지난 11일 <경향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세금은 ‘(내 돈을) 뜯어가는 것’ 혹은 정부가 돈을 거둬서 태워버리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며 “돈 있는 사람에게 돈을 뜯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식의 ‘선별적 복지’가 아니라 다 같이 돈을 내서 의료나 교육을 공동구매하는 ‘보편적 복지’라면 복지는 사치가 아니라 필수품”이라며 복지를 ‘공동구매’에 비유했다.
그는 “세금은 우리 집이고 학교이고 병원이다. 도서대여점에서 돈 내고 책을 빌려보는 대신 큰 도서관을 만들어서 책을 공짜로 빌려보면 오히려 더 싸게 책을 나눠볼 수 있는 거 아닌가”라며 “한국에선 복지도 ‘사치’나 ‘낭비’ 혹은 가난한 사람들의 의존성을 키우는 ‘독소’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또 장 교수는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우리는 이미 고복지 스타트 단계여서 새로운 복지를 만드는 건 맞지 않다”고 규정한 것에 대해서 “아이가 막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키가 크고 있는데 이 아이는 곧 어른만큼 잘 자랄 거니까 밥도 안 주고 놔둬도 된다는 이야기”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복지라는 게 나무 자라듯 그냥 자라지 않는다”며 “미흡한 수준이라도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틀을 잡아놨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지 자동으로 된 것이 아니다. 복지가 늘어나는 추세가 시작됐으니 가만히 있으면 늘어나게 돼 있다는 건 말이 좀 안 되는 이야기”라고 꼬집었다.
법인세 인상 반대와 같은 한국 정부 관료와 정치인들의 ‘친기업’ 정서에 대해 장 교수는 “세금 안 내고 규제 안 하는 게 결코 친기업은 아니”라며 “왜 모든 기업이 법인세 10%만 내는 파라과이 같은 나라로 가지 않느냐면 제공하는 서비스가 형편없기 때문이다. 독일은 법인세가 30%여도 기업들이 투자하는 건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법인세 관련 논쟁의 방향이 틀렸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침체된 이유로는 새로운 산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척하지 않은 데서 그 원인을 찾았다. 장 교수는 “휴대전화를 빼면 한국의 주력산업은 1970~198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며 “새로운 산업을 거의 개척하지 못했다. 첨단산업에서도 휴대전화와 반도체 말고 새로 뚫은 분야가 없다. 1990년대부터 산업정책을 등한시하고 의료관광, 금융허브 등으로 안이하게 경제를 키우려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자신이 지속적으로 한국 사회의 복지 강화를 주장해 온 것에 대해 “(한국사회에서) 떨어지면 도저히 재기할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드니 직업선택도 보수화되고 남에게 관대해질 수 없는 사회가 돼가는 것”이라며 “삐끗하면 나도 죽게 생겼는데, 대가족 제도가 해체돼서 주변에서 도와줄 사람도 없다. 사실 나는 복지문제 전문가가 아니다. 산업정책 전문가다. 그런데도 자꾸 복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