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가족 안전 안중에 없는 국정원.. 탄원서 등 언론에 흘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출신 탈북자 A씨의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 재판 비공개 증언과 탄원서를 언론에 유출한 곳이 국가정보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이 불리해지자 국정원이 ‘언론플레이’에 나선 것이다. 더욱이 A씨가 해당언론에 소송을 걸겠다며 항의하자 국정원이 이를 막기 위해 A씨를 회유하려 한 사실도 드러났다.
<한겨레>에 따르면 A씨는 “탄원서 내용이 4월1일 <문화일보>에 처음 보도된 뒤 소송을 내겠다고 항의했더니 국정원 (대공수사처) 이 처장이 찾아와 소송을 하지 말라고 만류했다”며 “(만류에는) 대가성이 있었다”고 밝혔다.
이 처장은 부하 직원 한 명과 함께 쇠고기 선물세트를 사들고 찾아와 A씨에게 ‘아들과 딸을 찾아주겠다. 소송은 하지 말아 달라’고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처장은 이후에도 전화를 걸어 거듭 회유했다고 A씨는 말했다.
이 처장은 국정원 간첩 증거 사건을 지휘한 팀장으로 ‘김 사장’으로 알려진 대공수사국 김 모 과장과 자살을 기도해 입원중인 권 모 과장과 함께 증거조작 관련 회의를 주재한 장본인이다.
국정원에 의해 유출된 A씨의 탄원서에는 ‘지난해 12월 비공개로 출석해 증언한 내용이 북한 보위부에 알려져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조사를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재판은 판사와 검사, 유우성 씨, 유 씨의 변호인 2명만이 참석해 비공개로 열렸기 때문에 탄원서 내용이 공개되자 유 씨 쪽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증거조작으로 국정원에 쏠린 비난을 유 씨 쪽으로 돌려놓으려는 의도로 보는 이유다.
국정원이 ‘언론플레이’를 한 정황은 이미 그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증거조작 의혹으로 국정원이 수세에 몰리자 이 처장은 A씨에게 “탄원서 내용에 대해 <동아일보>와 인터뷰해 달라”고 부탁했다.
A씨는 가족이 위험한 상황이어서 안 된다고 말했지만 이미 준비가 다 돼 있다고 말해 어쩔 수 없이 나갔다고 밝혔다. 다만 A씨는 동아일보 기자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며 ‘나 살자고 새끼들을 죽일 수 없다’며 보도를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해당 인터뷰를 내보내지 않았다.
이 처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동아일보 인터뷰 게재가 불발되자 다른 2개 언론사를 소개해줄 테니 다시 인터뷰를 하라고 거듭 요구했다고 했고, A씨는 북에 있는 가족들의 안전을 우려해 언론 인터뷰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일 국정원은 탄원서 내용을 <문화일보>에 흘려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국정원의 ‘작업 대상’은 <문화일보>만이 아니었다. A씨는 “문화일보 보도 다음날 같은 내용의 기사를 쓴 중앙일보 기자에게 항의 전화를 하니 ‘국정원에서 탄원서를 받았다’고 얘기했다”고 밝혔다. 실제 2일자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국가정보원이 공개한 탄원서에 따르면’이라고 돼 있다.
A씨의 항의를 받은 문화일보는 1일 저녁 인터넷에서 기사를 삭제했다. 하지만 다음 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탄원서 내용을 보도했다.
특히 출처를 밝힌 <중앙일보>와는 달리 <조선일보>는 탄원서의 사본을 사진으로 찍고 전문을 실으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탄원서 공개가 이 처장 혼자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내가 문제를 제기하면 국정원에서는 이 처장 선에서 끊고 ‘용도폐기’하려고 할 테지만, 난 국정원 전체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국정원의 이러한 증언·탄원서 유출은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 등이 적용될 수 있다. 국정원직원법은 직무상 알게 된 비밀 누설을 금지하고, 직무 관련 사항을 공표하려면 원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돼 있다.
한 부장판사는 <한겨레>에 “탄원서로 인해 비공개 증언을 한 탈북자의 신분이 노출된다면 비밀 누설로 봐야 한다. 충분히 국정원직원법 위반이 될 수 있다. 국정원이 탄원서를 받아 공개했다는 건 국가기관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A씨는 지난 7일 “유 씨 공판에서 한 비공개 증언 사실과 탄원서를 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북한에 있는 가족의 생사가 위험에 빠졌다”며, 자신의 증언 내용과 탄원서를 언론에 유출한 이들을 처벌해 달라는 내용의 고소장을 서울중앙지검에 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