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방과 사라지는 동료들(상)
VD사업부 인사과에 가면 한 평 남짓한 독방이 있다. 방에는 탁자 하나에 의자 두 개만 달랑 있고 벽은 온통 하얀색이다. 그림 하나 없이 휑한 흰 벽은 차가운 기운만 내뿜었다. 회사의 모든 사무실에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유독 그 방만은 이름도 없었다.
그곳은 인사과에서 직원들을 불러 면담하는 방이었다. 말이 면담이지 거의 취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사원들은 그 방에 가기를 두려워했다. 원래 면담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회사에 말하고 회사도 그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는, 상호 피드백을 위한 좋은 의미의 단어임에도 삼성에서 하는 면담은 공포의 대상이자 정신적인 고문과도 같았다.
일반 사원이면 누구나 면담 대상이 되었는데, 특히 회사가 희망퇴직이라 부르는 해고 대상자나 삼성에 비판적인 문제 사원(MJ 사원)이 많았다. 희망퇴직 대상자의 기준이 매우 모호하고 주관적이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직원들이 면담 대상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었다.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은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회사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자존감은 땅에 떨어지고 스트레스도 극에 달했다.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회사 측에서 심리전을 썼던 것이다. 인사과에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인사과에 불려 가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아, 이제 회사 다니는 것은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심적으로 위축이 되었다.
어느 사업부나 똑같았다. 모두가 평범한 사원들이었기 때문에 겁을 먹은 것이었다. 특히 IMF 이후 삼성이 많은 직원들을 해고했던 시기의 면담실은 고문실보다 더한 곳이었다. 하룻밤이 지나면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룻밤이 더 지나면 동료들이 또 사라졌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사라져간 동료들은 삼성전자에서만 수만 명에 이르렀다. 노조가 없기 때문에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해고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수가 해고되었는지는 나중에 당시 삼성기업 구조조정본부 본부장이었던 윤종용 사장을 다룬 책에서 확인되었다.
“당시 100여 개에 달하는 삼성전자 사업부 중 무려 30여 개의 사업부가 사라졌다. 제품 수로는 140여 개에 달했고 제품라인은 52개였다. 해고된 직원 수는 2만 3,000명이었다. 윤종용 사장이 직접 ., ×표를 치면서 잘라냈다.”(《세계를 움직이는 삼성의 스타 CEO》, 61쪽)
그 이후 삼성전자에는 경제위기 때가 아닌 평상시에도 직원을 해고할 수 있는 상시 구조조정 체계가 만들어졌고, 회사가 엄청난 순이익을 얻을 때에도 사원들은 계속 잘려 나갔다. 현장이 이런 상황이었으니 직원들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해고되어야 하는 이유조차 알 수 없어 공포스러운 상태에서 사람들은 룰렛 게임을 하듯 한 명씩 한 명씩 삼성에서 사라져갔다. 차라리 쌍용자동차처럼 대놓고 해고했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성은 수많은 간교한 방법을 총동원하여 직원들을 잘랐다.
삼성은 사람들의 심리를 최대한 이용했다. 제조그룹 간접부서(기술파트)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퇴직서를 들이밀고 “시한이 며칠 남지 않았다. 12월 며칠까지 나가라”며 사인을 강요했고, 거부하면 사인할 때까지 몇날 며칠을 계속 불러댔다. 생산라인에 있는 여사원들에게는 “구미로 전배(배치전환)를 가라. 만약 가지 않으면 퇴사해야 한다”고 말했고, 회사 요구대로 따르지 않으면 정말로 퇴사시켰다. 사원의 의사는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면담을 실시하여 지시를 내리고, 그것을 거부하면 그것이 곧 해고의 이유가 됐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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