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도 없이 무조건 목숨을 바쳐야 하는 나라’
<이 글을 쓰고 있던 5월 28일 새벽, 장성 요양병원에서 불이 나 노인 환자 등 21명이 또 숨졌습니다.>
사고 후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와 뽐뿌 등에는 고양시외버스터미널 화재 현장에 투입된 소방관에 대한 글이 올라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화재진압 도중 눈을 물로 씻는 소방관의 사진 밑에 현직 소방관이 열악한 소방관의 장비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다른 소방관은 자신은 사비를 들여 해외 인터넷 사이트에서 장비를 구입한다는 댓글을 올렸습니다.
장비를 해외에서 구입한다는 댓글을 본 현직 소방관의 아내는 남편에게 사주고 싶다면서, 사이트 주소를 알려달라는 글을 남겼고, 이 게시글은 많은 시민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알려준 댓글이 진짜 대한민국의 현실인지 알아봤습니다.
‘두 명 중의 한 명은 장갑도 방열복도 없는 소방관’
2012년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대한민국 소방관이 화재 진압 출동 시 입는 방화복의 수량이 7,4% 부족하다고 합니다.
문제는 보유하고 있는 방화복 4벌 중 1벌은 내구연한이 지났다는 사실입니다.
산소마스크가 없는 소방관이 1천849명에 달해, 소방관들은 산소마스크를 돌려쓰고 있었습니다. 누가 출동하면서 산소마스크를 가져가면 다른 사람은 사용하지 못합니다.
얼굴을 보호하는 방화두건의 보급율은 고작 60.4%에 불과하고, 보조마스크도 64.3%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마저도 보조마스크의 23%가 노후되어 교체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헬멧은 1인당 1개씩은 있지만, 노후율이 24.9%에 달해, 건물 내부 붕괴 시에 머리를 보호하기 어려워 소방관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장비 보급과 노후율이 지자체마다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는 점입니다.
세종시도 364개의 장갑이 필요하지만, 보유는 216개로 148개의 장갑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단순히 장갑뿐만 아니라 특수작업용 방열복의 경우, 부산은 309개로 보유율이 50.6%였습니다. 세종시는 40개가 필요하지만, 현재 10개만 있어 보유율은 25%에 머물고 있습니다.
노후된 장갑을 사용하다 보니 화재현장에서 장갑이 녹아 소방관이 화상을 입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결국 게시판의 글처럼 부산과 세종시에 근무하는 소방관들은 장갑이 필요하면 사비를 털어 인터넷에서 구입해야 했습니다.
‘대형 재난 발생하면 막을 수가 없는 나라’
대다수 국민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소방관은 모두 중앙정부 공무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소방관은 안행부 소속과 지방자치단체 소속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소방관은 소방방재청이나 안행부 소속이 아닌 지역 소방본부(예:경남소방본부) 소속으로 지방자치단체장의 명령과 지시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소방관과 시스템이 분리되어 있다 보니, 중앙119와 지역119 등의 공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장과 중앙119의 명령이 다를 경우 지방소방본부 소방관은 중앙119가 아닌 지자체장의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소방관의 소속이 지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문수 지사가 경기소방서에 전화해서 경기도 지사를 외쳤답니다.)
2010년 부산 해운대 고층빌딩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부산소방본부 소속 소방차 수십 대가 동원됐지만, 빨리 화재를 진화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의 하나가 68미터 이상의 고층건물 화재 진압용 굴절사다리차가 없었던 부분도 있습니다.
이후 소방방재청은 고층건물 화재 진압을 위해 68미터 이상 굴절사다리차를 해운대소방서에 배치했습니다. 문제는 우리나라에 68미터 이상 굴절차가 단 한 대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68미터 이상 굴절사다리차를 이용하기 위한 지지대 설치 장소와 전선 문제 등으로 실효성이 의심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 단 한 대뿐이라는 사실과 52미터용 고가사다리차도 출고된 지 한 달만에 부러지는 모습을 보면, 고층빌딩 화재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갖기에 충분합니다.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혹시나 모를 원전 사고에 대해 한국은 여전히 무감각합니다. 원전이나 가스 유출 사고 등을 진압할 소방관의 장비가 태반이 노후됐기 때문입니다.
유승우 의원실에 따르면 원전 인근 4개 소방서 근무인원은 676명이지만, 방사선 보호복은 단 40개만 있다고 합니다. 그마저 21개는 낡아, 소방관이 투입되더라도 화재와 사고를 막을지 의심이 됩니다.
‘장비도 없이 무조건 목숨을 바쳐야 하는 나라’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총 1,714명의 소방관들이 순직하거나 부상을 당했습니다. 연평균 5,4명이 화재진압이나 구조활동을 하다가 순직하는 것입니다.
특히 미국과 비교하면 약 2배, 일본보다는 5배 높은 순직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소방관들이 화재와 구조 작업을 부실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 소방관들은 이렇게 많은 사망과 부상이 발생하는 이유를 ‘개인 안전 장비 부실’로 보고 있습니다.
소방공무원의 이직률이 높은 이유는 장비는 부실하면서도 인원 충원은 없어, 업무의 과중으로 부상과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 구조부터 눈 치우기, 고드름 깨기, 잠긴 문 열어주기 등 별의별 잡다한 일을 하면서도 화재 현장에 부상자와 사망자가 많으면 벌점을 받고, 심지어는 파면되기도 합니다.
‘한국 소방관 vs 미국 소방관’
한국 소방관들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장에 출동하여, 물걸레를 들고 수백 개의 의자를 닦고 정리했습니다.
‘국민행복시대의 출발은 국민안전에 있고 그 일선에 있는 소방공무원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외쳤던 박근혜 대통령이지만, 대한민국 소방관들은 여전히 낙후된 장비를 착용하고 목숨을 내걸며 하루에도 수십 번의 출동을 하고 있습니다.
‘노예소방’이라 불리는 소방공무원을 이대로 놔둔다면, 대한민국에서는 목숨을 내걸고 우리를 구해주는 ‘영웅’이 점점 사라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