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전 ‘신뢰의 미생’.. 대선 후 ‘약속 깬 애인’
4년 전 세종시 수정안 논란 당시 등장했던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고사성어. 다시 정치권의 전면에 등장했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 미생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중국 고서에서도 크게 엇갈린다.
신의 지킨 죽음 VS 고지식한 헛된 죽음
어떤 이는 신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훌륭한 죽음으로, 반면 몇몇 고서들은 ‘미생의 죽음’을 융통성 없는 고지식한 헛된 죽음의 본보기라고 혹평한다.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미생.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 아래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 미생은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가 여인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때마침 많은 비가 내려 개울물이 불어나는데도 다리 교각을 붙든 채 여인을 기다리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신의에 초점을 맞추면 사랑하는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목숨을 던진 감동적인 러브스토리가 되지만, 목숨에 포커스를 맞추면 약속이라는 명분에 집착해 가볍게 목숨을 내던진 ‘바보 이야기’가 되고 만다.
4년 전 미생 죽음은 ‘신의의 실천’이라더니
정치권에 ‘미생의 죽음’이 논쟁의 핵심으로 등장한 건 4년 전. 한나라당 대표였던 정몽준 의원은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던 박근혜 의원의 행동을 미생의 죽음에 비유했다. ‘세종시 건설’ 정부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이 불어나는데도 애인과의 약속 때문에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 미생의 우둔함과 같다는 얘기다.
그러자 박근혜 의원은 “그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며 “약속을 안 지킨 애인은 진정성이 없었지만, 약속을 지킨 미생은 진정성이 있었다”고 맞받아쳤다. 또 “미생은 목숨을 잃었지만 후대에 귀감이 됐고 애인은 평생 괴로움속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을 것”이라며 날을 세웠다.
4년 전 박근혜 대통령은 미생의 죽음을 ‘신의의 실천’으로 해석했다. 미생을 바보 취급하는 정몽준 의원을 호되게 비판하며 미생처럼 자신도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대선 때에는 신의와 원칙을 자신의 브랜드로 각인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선거 공약을 발표할 때마다 ‘신뢰’을 강조했다.
표 되면 무조건 건들기, 기초 공천제 폐지도 그 중 하나
그러면서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 등 야당의 어젠다를 선점하기위해 진보적 정책을 발 빠르게 채용해 먼저 발표했다. 정치쇄신 논의에도 야당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철수-문재인 후보가 제시한 기초의원 공천 폐지도 공약으로 내세웠다.
야권 후보들보다 ‘기초 무공천 공약’을 늦게 제시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야권 두 후보에 비해 수위를 높였다. 안철수-문재인 후보는 기초의원 공천제 폐지를 공약했지만 박근혜 후보는 한술 더 떠 기초의원뿐만 아니라 기초단체장 공천까지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선 직전인 2012년 11월 20일 박근혜 후보는 “기초의원·단체장에 대한 정당공천제 폐지를 통해 기초의회와 기초단체가 중앙정치의 간섭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지방정치를 펼치도록 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안철수, 박근혜에게 “미생 죽음 어떻게 보느냐”
하지만 말과 행동은 완연히 달랐다. 지방선거가 가까워지자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공약 폐기 수순을 밟기 시작한다. 새누리당은 “기초 무공천 공약은 신중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을 바꾸며 “정당공천 폐지는 위헌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노골적인 공약 파기 선언이다.
청와대는 이런 여당 뒤에 숨어 입을 다물고 있다. 박 대통령에게 불리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침묵으로 일관해온 그 버릇 그대로다. 국가기관 대선개입, 국정원 정치관여, 간첩사건 조작, 부정선거 논란, 대표 공약 파기, 복지공약 대폭 수정 등에 대해 비난 여론이 비등할 때마다 여당을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야당만 기초 공천을 포기할 경우 지방선거에 큰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자 안철수 공동대표가 “미생의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며 박 대통령에게 여야 영수회담을 제안했다. 또 “4년 전 미생에 대한 입장이라면 기초선거 무공천 약속은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며 박 대통령을 압박했다.
뒤에 숨어 “여의도 문제는 여의도가”
박 대통령이 회담에 응할 가능성은 없다. 며칠 전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가 청와대 정무수석을 만나 공천 폐지가 박 대통령 대선 공약이었던 만큼 대통령이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여의도 문제는 여야 관계에 맡기고 관여하지 않는 것이 대통령 방침”이라는 답뿐이었다.
스스로 약속해놓고 깰 때는 여야 핑계를 댄다. 무공천에 반대하는 건 여당인데도 ‘여의도 문제’로 치부한다. 반대하는 여당을 앞세워 그 뒤에 숨겠다는 얘기다. 국회 일이니 관여할 바 아니라는 속 보이는 선긋기. 약속을 깨고도 저렇게 파렴치하다니.
청와대 의중이 곧 여당 당론이라는 것 세상이 다 안다. 새누리당은 ‘청와대의 국회 분실’이라는 농이 나올 정도다. 사장이 직원에게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도 약속을 깨면서 그 이유로 ‘관련 부서책임자가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둘러대는 거나 똑같다. 사장의 알량한 뻘짓에 직원들이 뭐라 할까.
대선 전 ‘신뢰의 미생’, 대선 후 ‘약속 깬 애인’
미생의 신뢰를 실천하겠다던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당선된 후엔 미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애인처럼 행동한다. 후보 시절에는 미생의 죽음을 ‘신뢰가 준 감동’이라고 해석하는 척하다가 청와대에 들어가서는 ‘미생은 바보’라고 비웃나 보다. 미생을 조롱했던 정몽준 의원과 ‘닮은꼴’이 되고 말았다.
약속을 지킨 미생에서 약속을 안 지킨 애인의 모습으로 달라진 박 대통령. 대선 전에는 진보영역의 정책까지 자신의 공약집에 넣어 미생의 이미지로 포장하더니, 당선된 뒤에는 약속을 깬 애인의 역할에 친숙해진 모습이다.
미생은 애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었지만 박 대통령은 자신이 살기 위해 국민과의 약속을 깨고 있다. (☞ 국민리포터 오주르디 ‘사람과 세상 사이’ 블로그 바로가기)
- 통일대박? 서독처럼 안하면 예멘 꼴 된다
- ‘박정희 신격화’ 비용, 국민이 대고 TK후보가 활용
- ‘까고 덮고’ 희한한 채동욱 수사 왜?
- 자살 소동, ‘국정원 정치’가 빚은 타살
- 새누리당, 대통령 앞세워 종편 지켜내기
- 낙제생 종편이 우등생? 심사 아닌 정권 입맛
- ‘모르쇠’ 일관하는 검찰과 국정원.. 기막힌 ‘바보놀이’
- 국보법에 발목 잡힌 검찰, ‘자승자박’ 풀 해법은?
- 국정원 앞 검찰총장 ‘갈팡질팡’.. 원인은?
- 간첩조작 사건의 실체 담긴 영사확인서
- 낙하산 없을 거라던 새정부.. ‘대통령의 사기극’
- 위조사건 수사, ‘檢-국정원-靑’ 헐리우드액션?
- 권언유착 50년, 방일영 부자와 박정희 부녀
- ‘박근혜의 새정치’와 김지태 유족의 눈물
- “통합신당, ‘반사이익’ 내주면 패배할 수도 있다”
- ‘코미디 검찰’.. 간첩 위조 인정, 공소는 유지?
- 광고 없애야 공정방송? KBS수신료 인상 궤변
- 모든 정황 국정원 지목.. 檢, 여전히 ‘언감생심’
- 스텝 꼬인 새누리, 한기호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