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유신, 87년 6월 항쟁 언급 하지마”

월간 <현대문학>, 원로작가 이제하 씨 소설 연재 거부

원로작가 이제하 씨가 자신이 쓴 소설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월간 <현대문학>으로부터 연재 거부를 당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이씨는 내년 1월호부터 한국으로 귀화한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소설 <일어나라, 삼손>을 연재하기로 했으나 1회분 배경으로 ‘박정희 유신’과 ‘87년 6월 항쟁’ 등을 언급한 게 문제가 돼 연재 거부를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소설가 이제하 씨  ⓒ 페이스북
소설가 이제하 씨 ⓒ 페이스북

이 씨는 지난 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연말로 접어드는 동짓달 초두 아침부터 날벼락을 맞는다”며 <현대문학>에 연재하기로 한 소설이 ‘컷 당한’ 사실을 밝혔다.

이 씨는 글에서 “에세이 연재를 소설연재로 바꿀 때 정치 얘기는 피해달라는 주문이어서 ‘그런 얘기 아녜요. 쓴 적도 없고. 선교사 얘기예요’라며 편집 대행에 해명까지 했는데 그 꺼림칙하던 느낌이 주간 선에서 폭발을 불러왔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현대문학> 측에 연재 거부 이유를 묻자 “(잡지사가) 현대소설을 바란다. 미래 지향적인 뭐라고 우물쭈물 하면서 몹시 미안해했다”고 전했다.

그러자 이 씨는 “이거 진행형인 현대가 배경인데요. 안 읽어보셨어요?"하다가 얼떨떨해서 입을 다물었다. 백 여매 써서 넘긴 1회분 배경에 ‘박정희 유신’과 ‘87년 6월 항쟁’이라는 시대배경을 서술하는 단어 두 개가 들어갔던 것을 깨달은 것”이라 밝혔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문예지인 월간 <현대문학>은 1955년 주간 조연현, 편집장 오영수 체제로 창간됐으며 신인추천제와 현대문학상을 통해 많은 작가를 배출하면서 순수문학 진영을 대표하는 잡지로 자리매김했다. 1988년 대한교과서가 인수한 뒤 사주 일가인 양숙진씨가 주간을 맡아왔다.

이 씨는 “이 잡지(현대문학)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그 뒤 숱한 부침과 곡절을 겪는 와중에서도 그 중심의 방향이나 편집정신 만은 믿음이 갔고 믿어왔었다”며 “선배들의 문협 이사장 선거 행태에 환멸을 느껴 이 잡지가 주는 74년도 문학상을 거절한 적이 있었는데 그 보복을 이제야 당하는 것인가 하고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고 술회했다.

또한 이 씨는 “박근혜 대통령 수필 게재 여파로 이 잡지가 엘러지 착종 비슷한 상태에 빠져있다는 짐작은 갔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다”며 “소설의 표현력이나 형상력 미달로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면 충분히 이해하고 물러날 수 있어도 이건 그게 아니라는 심증부터 짚인다”고 말했다.

지난 9월호에 <현대문학>은 박근혜 대통령의 수필을 찬양한 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의 글 ‘바른 것이 지혜이다’를 게재해 문단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 교수는 당시 “그(박 대통령)의 에세이 대부분은 우리들의 삶에 등불이 되는 아포리즘들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다”고 평가해 객관성 부족, 정치적 편파 등의 질타를 받았다.

이 씨에 따르면 이번에 연재를 거부당한 <일어나라, 삼손>은 ‘시인도시’라는 첫 챕터 구성으로 전개되는, 한국으로 귀화한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다.

그는 “이 후진 나라에 왜 그가 귀화까지 할 수 밖없었는가를 따지면서 미국이란 나라가 우리에게 대체 무엇인가 라는 문제까지 짚어볼 요량이었다”며 “설마 진행 중이고 미지수인 이런 주제까지 주간이 넘겨다봤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주간의 처지로 보면 보수적 경향을 띨 수밖에 없는 사정은 이해한다”면서도 “문학이나 문예지의 지평은 그런 경향에 예속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혼의 자유라는 테제가 중심이 되지 못한다면 문학도 문예지도 한낱 남루한 패션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라 비판했다.

더 큰 문제는 월간 <현대문학>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원고를 거절당한 작가는 이제하씨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설가 정찬 씨도 지난해 12월 <현대문학>에서 장편 연재 요청을 받고 9월 초 1회분 원고를 보냈지만 양숙진 주간이 “‘현대문학’은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잡지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가시화된 작품을 다루지 않았다. 다른 잡지에서는 문제가 안될 수 있지만 ‘현대문학’ 연재물로서는 문제가 된다”며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201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평론가 양경언씨도 이 잡지 11월호에 자신이 쓰기로한 시평(詩評)에 ‘박 대통령 찬양’으로 문제가 됐던 9월호의 이태동 교수 비평문을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그러자 11월호 원고를 검토하던 10월 중순 양 주간이 양 씨에게 전화를 걸어 “9월호 때문에 속상한 일들이 많아 다시 그 일이 환기되는 게 괴로우니 빼줬으면 좋겠다”고 요구했다.

그의 글은 결국 ‘현대문학’이 문제 삼은 부분이 빠진 채 11월호에 수록됐다. 양씨는 “문제는 대통령 찬양글이 실렸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는 글을 막았다는 것”이라며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억누르는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현대문학>의 정치적 편향성 문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기고 거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시인 황인찬씨는 “며칠 전 내년 2월호 원고 청탁을 받았지만 거절했다”며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젊은 문인들이 모여 성명서를 내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경향신문>에 밝혔다.

한편 논란의 중심에 있는 양숙진 주간은 “언론과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잡지사를 통해 전했다. 

저작권자 © 고발뉴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