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 정치는 없다. 그래도 나라인가? 궐 안이든 밖이든 음모와 암투만 판친다. 불길한 ‘신탁’과 넘치는 비밀들과 귓속말, 그 속에서 정작 백성을 위하는 정치는 실종됐다. 그토록 무시무시한 왜란의 세월마저 견뎌냈으나, 백성의 삶은 살아도 산 게 아니다. 기다리는 것은 가혹한 세금과 징발뿐이다. 무너진 궁궐을 더 화려하게 지을 생각만 하지, 무너진 사람의 도리와 살림살이는 일으켜 세우려 하지 않는다. 정치가 없는데 무슨 ‘화정(華政)’을 입에 담으랴.

MBC <화정>은 광해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다. 제목은 아름답고 화평한 정치라지만, 시절은 극악무도하고 잔인하다. 선조의 죽음으로 시작해 광해군의 즉위 초부터 인조 말까지를 다룬다고 한다. 그런데 작품 개요를 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고귀한 신분인 공주로 태어났으나 권력 투쟁 속에서 죽은 사람으로 위장한 채 살아가는 정명공주의 삶을 다룬 드라마.”

▲ ⓒ MBC 드라마 <화정> 공식홈페이지

그렇다. 드라마 <화정>의 주인공은 광해군(차승원 분)이 아니다. 정명공주(이연희 분)다. 선조가 51세에 19세의 인목대비와의 가례로 얻은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은, 어머니가 어쨌든 ‘정실부인’인 관계로 ‘적통’이 되었다. 13년 동안 세자였으며 임진왜란 내내 실질적 군왕 역할을 맡아야 했던 ‘서자’ 광해군은, 뒤늦게 나타난 적통들 때문에 왕위를 위협 당한다. 어미에게 ‘서열’을 매기는 그 잔인한 조선조의 습속도 왕가에는 사실 예외적이었는데, 이 드라마는 유난히 이 설정에만 집착한다. 그리고 광해군은 왕이 되어서도 기반이 한없이 취약하고, 딸 뻘인 어린 정명공주는 늘 당당하고 꿋꿋하다. 누구 앞에서도 일단 호통부터 치고 본다. 지존인 광해군 앞에서도 또박또박 ‘오라버니’라 부르며 일대일 대화를 나눈다. 어느 왕실 어느 시대인지 모를 ‘평등한’ 대화다. 정명공주를 중심으로 너무 ‘평등’하여 법도가 없어 보일 지경이다.

▲ ⓒ MBC 드라마 <화정> 공식홈페이지

차승원이 맡은 광해군은 슬픔과 우수에 찬 눈빛으로,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르는 고난의 과정을 심도 있게 보여주었다. “하늘의 뜻보다 강한 것은 사람의 의지라는 것을” 믿는 한음 이덕형(이성민 분) 대감과 대동법과 민생구제의 열망을 그릴 때도 뭔가 뭉클한 게 있었다.

그런데 초반부터 드라마는 온통 ‘적통 논란’에만 빠져 있다. 광해군의 ‘개혁정치’나 혹은 잿더미를 딛고 새 시대를 열고자 했던 최소한의 열정만이라도 그릴 줄 알았던 애초의 기대는 깨졌다. 현재 극 속에서 그의 즉위와 재위는 모두 음모론 자체가 돼버렸다. (역사에 언급 없는)아버지를 독살하고 즉위해, 형제를 죽이려 한다는 것 말고는 줄거리도 보이지 않는다.

▲ ⓒ MBC 드라마 <화정> 공식홈페이지

드라마 <화정>은 아역배우를 통한 정명공주의 어린 시절부터의 남다른 ‘여성적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인의 눈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해석하는 게 사극이라지만, 도저히 조선시대의 잣대로는 상상되지 않는 대사와 설정들이다. 공주가 노예 신분으로 그것도 쫓기는 신세가 되어 ‘죽은 목숨’이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일본 땅에서 ‘화약(火藥)’을 구해와 정국을 평정한다는 게 이후 줄거리가 될 모양이다. 이쯤 되면, 굳이 광해군 시대로 잡지 말고 시대불명의 팩션이었어야 한다. 타임슬립도 팩션도 아니니, 그저 역사왜곡 드라마인가?

겉으로는 엄연한 ‘정통’ 사극의 모양새다. ‘가상’이라거나 ‘허구’라는 설명이나 자막조차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이 드라마, 굉장히 얼토당토않다. 역사에 기록이 나오지 않는 공주가, 일본으로 가서 무기를 배우고 온갖 풍파를 겪는 것을 상상해서 그리려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 역사처럼 숨어서 십여년 간 죽은 척하고 지낸 공주의 모습이 아니다. 처음에 제목을 정명공주로 하려다 역사 왜곡 시비가 있을까봐 바꾸었다는 뒷얘기가 차라리 더 솔직하다.

28일 어린 정명공주(정찬비 분)는 해치려는 이이첨(정웅인 분)의 눈을 피해 남장을 한 채 나룻배에 몸을 싣고 궁궐을 빠져나간다. 이는 인목대비(신은정 분)가 딸을 구하기 위해 묘책을 쓴 것이다. 하지만 정명공주는 거친 파도 탓에 표류하다 일본으로 향하는 노예선에 오르게 됐다. 이어 공주는 일본 유황광산에 가서 원치 않던 노예 생활을 시작했다. 고된 강제노동을 하며 죽지 못해 살다가 유황광산 근처 호수가 끓어오르는 것을 본다. 곧이어 화산이 폭발하고 13.1%의 분당 최고 시청률을 올린 이 장면으로 끝났다. 환타스틱한가?

▲ ⓒ MBC 드라마 <화정> 공식홈페이지

정명공주의 실제 역사는, 그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목숨만 부지한 것이다. 인목대비는 십여년을 정명공주를 덕수궁 깊숙이 숨겨두고 누가 안부를 물으면 ‘죽었다’고 대답했다 한다. 이 또한, 왕위와 아무 상관없는 공주였기에 죽은 시늉이나마 가능했던 덕이다. 누군가의 신묘한 재주나 전략, 리더십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감이 없어서였다. 조선시대에 거의 사회적 생활을 원천봉쇄 당했던 여성의 처지였기에 목숨만 부지한 사람에게서, ‘화합과 상생’의 리더십을 어찌 찾아낼지 기가 막히다. 존재감이 아예 없기에 살아남은 것뿐이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여성적 리더십이란 것도 있을 수 없다.

공주가 인조반정 이후 세상에 나오고 결혼해 83세까지 많은 자녀를 두고 장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굳이 이유를 따진다면 오로지 ‘죽은 척’ 덕분이었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것도 아니고 오늘의 현실을 반추할 시사점을 갖지도 않는, 어떤 한 여자아이의 턱없는 무용담에 공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수년 전 MBC가 방영한 <선덕여왕>의 덕만공주의 모습과 ‘당당함’만이 겹쳐 보인다. 그 또한 터무니없는 무용담이었다.

▲ ⓒ MBC 드라마 <선덕여왕>

제목 '화정'은 정명공주가 남긴 글씨라고 한다. 동명의 ‘원작소설’이 시중에 나와 있다. 그런데, 이 또한 드라마의 첫 방영 즈음에 맞춰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묘하고도 희한한 타이밍이다. 정명이 아무리 놀라운 활약으로 드라마 속을 누비며 신묘한 재주를 펼친다한들, 어차피 오갈 데 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후 드라마가 그려야 할 것은 참담하고 끔찍한 실제의 역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