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제일 모르는 것도 나, 나를 제일 증오하는 것도 나. 함정에 빠뜨리는 것도 해독제를 주는 것도 모두 나다. 합쳐지지 않는 나, 이토록 무겁고 버거운 나. 나는 정말 내 생각과 말과 행위의 주인이긴 한 것일까?

재벌가의 아들이 자신의 여리고 약함을 한없이 내보이며 ‘아픈 척 약한 척’을 하는 게 이젠 로맨스 드라마의 공식이 된 듯하다. <파리의 연인>(2004) 등의 ‘출생의 비밀’ 정도로는 이제 안 통하니, <상속자들>(2013)은 주인공 나이를 고등학생으로 확 낮춰버렸다. 평범한 여고생이 봐도 기댈 어깨를 내주고 같이 울어줘야 할 것만 같은 ‘상처받은 아이’인 재벌 상속자는 거기서 더 나아가 필요시 수시로 인격을 ‘창출’한다.

▲ ⓒ SBS 드라마 <파리의 연인, 2004>/<상속자들, 2013>

한 사람의 속에 다른 인격이 심지어 많게는 7개나 존재하고, 옷을 갈아입듯 ‘인격’을 갈아입는다는 내용의 수목드라마가 지상파에서 동시에 방송 중이다. 재벌 후계자가 어떤 ‘평범한’ 여자를 ‘미치도록’ 사랑한다는 내용도 같다. MBC <킬미, 힐미>와 SBS <하이드 지킬, 나> 얘기다. 시청률이라는 방송사의 잣대로 보면, 승자는 배우 지성이 열연 중인 <킬미, 힐미>의 차도현이다. 인격이 무려 7개다. <하이드 지킬, 나>에서 현빈이 맡은 구서진은 두 개다. 둘이든 일곱이든 인격이 쪼개져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건 같다.

그들은 아파도 아주 심하게 아프다. 격리 치료가 필요한 건 아닐까 싶다. 이건 염려다. 아픈 사람은 병부터 고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드라마 속 재벌 후계자들은 쉬는 법이 없다. 자나깨나 ‘회사’ 생각이다. 아니 ‘승계’ 걱정이다. 남들보다 더 잠 안 자고 일만 한다. 가문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 그런 아픈 사람이 그룹 대표직을 수행하느라 ‘보통’ 사람도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일하는 게 정말이지 이상할 뿐이다.

이렇게 아파서 제 몸 하나 못 가누고 제 정신 하나 수습 못하는 사람이 늘 사장실에 홀로 앉아 일을 한다. 결재서류를 검토하고 최종 결정권을 행사한다.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 쪼개지고 부서진 인격을 난파선처럼 끌어안은 채 말이다. 그런 지경에서도 일을 하고 있음에 경의라도 표해야 하는 것인가! 재벌도 ‘온전한’ 정신을 붙들고 살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제 인격을 7개로 쪼개는 마당에, 빈손인 우리가 제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야말로 미친 짓처럼 보인다.

<킬미, 힐미>는 제목을 생각하면 슬퍼지기까지 한다. ‘킬미’도 ‘힐미’도 자기 몫이다.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도, 나를 구하고자 하는 것도 모두 나다. 인격은 7개로 쪼개져 버렸지만,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어떻게든 이 분열된 ‘나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 드라마 속에서는 대표 인격인 ‘차도현’ 한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겠다. “차군에겐 없고 신군에겐 있는 매력을 조금만 꺼내 봐요. 할 수 있다니까요.” 그의 곁에서 헌신적으로 그를 다독이고 안아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연인이자 정신과 주치의인 그녀 오리진(황정음 분)의 말이다.

나름 계산적 결론이기도 하다. 차도현은 ‘승진그룹’이라는 재벌가의 후계자다. 현재는 ID엔터테인먼트 부사장이다. 나머지 ‘인격’들에게는 ‘직업’도 마땅한 지위도 없다. 그저 ‘차도현’을 공격하고 짓뭉개고 차도현으로 사는 세상을 파괴하는 것뿐이다. 인격 중 하나인 ‘안요섭’의 임무는 심지어 ‘우리들의 끝’, 곧 자살이었다. 7개의 인격들이 모두 사랑하는 한 여자 오리진에게 연락하고 결국 그녀가 구조해냈다는 결과만 봐도 정말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닐지 모른다. 어쨌든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는 인격인 ‘신세기’와 ‘차도현’은 서로를 죽이려 한다.

▲ ⓒ MBC 드라마 <킬미, 힐미>

어쩌면 인간 심리의 가장 공공연한 비밀인지도 모른다. 나를 가장 미워하는 것도, 나를 가장 사랑하는 것도 나인지 모른다. 자기혐오와 자기애를 조화롭게 관장할 객관적인 중재자로서의 균형은 참으로 중요하다. 시청자가 감정이입하는 건, 그런 내적인 갈등 부분을 누구나 겪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있다. 다중인격 드라마가 정말 다수 시청자들의 아프고 쓰라린 마음을 헤아려주는 기획일 리는 없다. 저렇게 지치고 불쌍해 보이는 ‘차도현’의 직업은 엔터테인먼트 회사 부사장, 재벌3세다. <하이드 지킬, 나>의 ‘구서진’은 놀이공원 대표다. 그들이 인격 통합에 목숨 거는 것도 타고난 금수저를 지키기 위해서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겠다고 선언하지 않는 한, 그들은 만인 위에 군림한다.

▲ ⓒ SBS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

‘돈 버는 일’에서 놓여나 사회봉사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정신적으로 더 건강해지련만, 한국 드라마는 이상하게도 아픈 재벌 후계자들에게 기어이 ‘회장님’이 되라고 한다. 재벌가의 자식이 기업을 ‘상속’하는 게 법칙 같고 물론 그래야 드라마적 로맨스가 성립된다는 식이다. 솔직히 <킬미 힐미>의 극중 최대 위기는 차도현이 ‘부사장’ 직에서 내쳐지고, 승진그룹 후계구도에서 밀릴까봐 시청자가 걱정해 주는 데서 온다. <하이드 지킬, 나>의 구서진이 아버지에게 인정 못 받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게 인간의 심층 심리를 다룬, 이른바 힐링의 연속선상에 놓인 드라마일지도 모른다는 시청자의 기대는 여기서 산산조각난다. 다중인격은 재벌 후계자의 새로운 매력인 것이다. 그들의 온전하지 못한 정신세계와 언행불일치와 미숙한 사고조차 다 이해해 달라는 사전포석 같다. 비정상을 넘어 정신 이상임에도, 금치산 혹은 한정치산의 상황임에도, 재벌가에 태어난 자가 재벌이 된다.

부당한 ‘회항 지시’의 대한항공 ‘부사장’ 자리도 재벌3세의 것이었다. 땅콩과 회항의 기이한 ‘스토리’ 또한 하나부터 열까지 정상은 아니었다. 정작 현실의 고단함에 인격이 수백 갈래로 찢어질 지경인 건 대다수 시청자들인데, 로맨스 판타지의 포장에 시청자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 구도를 수용하고 심지어 응원까지 하고 있는 셈이다.

▲ 김원 문화평론가

이 두 드라마의 파격 결말을 기대해도 좋을까? 재벌 후계자가 모든 (부당한)기득권을 내려놓고 진정한 치유와 기쁨을 얻었다는 해피엔딩 말이다.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위해 가진 것 모두를 내놓고 호탕하게 다 써버렸으며, 대신 이웃들의 행복을 통해 비로소 정신통합의 평화를 얻었다는 그럴듯한 이야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