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건 이완용들이다. 매국노라고 부르는 이들은 중국에 사대해온 친명파 따위와는 등급을 달리한다. ‘있는 나라’ 조선/대한제국을 팔아먹은 1차 친일파들이다. 기록된 역사 두 천년 동안 국권을 완전히 상실한 건 이때가 처음이다. 2차 친일파는 일제강점기 동안 외세에 빌붙어 겨레붙이들을 흡혈한 자들이다. 3차 친일파는 광복 뒤 친일파들이다.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 자들도 있다.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 청원서(1919.3.3.)를 내자 신채호(3.10. 밤)는,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라고 꾸짖었다. 신채호와 뜻을 같이 한 이는 이회영, 박용만으로 셋 다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해온 인물들이었다. 그들 눈에는 ‘없는 나라’를 매국하는 행위가 더 흉칙해보였던 것이다.
‘있는 바다’를 넘기는 자들은 근자에 출현했다. 자칫 애국가 첫 줄 첫 마디를 바꿔야 하는 일이라도 머잖아 생길 것인가. ‘있는 바다’가 ‘없는 바다’인 양 되어가고 있는데도 말 한 마디 없는 자들이 있다. 하물며 이를 기꺼워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들과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김치를 먹고, 같은 노래를 부른다는 게 욕스럽다. 본색을 노골화하고 있는 3차 친일파들이다.
이름은 존재를 규정한다. 하이데거 말을 빌리자면 이름이란 존재의 명명이다. ‘있는 바다’의 이름이 바뀌는 건 역사와 문화 주권으로서 바다가 참절되는 일이다. 동해는 영해 이상의 깊은 뜻을 품은 내력을 지니고 있다. 이 바다가 생긴 이래로 오늘 같은 시련은 일찍이 없었다. 동해는 해가 뜨는 바다라는 아름다운 이름이고 한국이라는 이름 한 글자 들어가 있지 않았으니 일찍부터 중립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선한 명칭이다. 일본에 귀속되는 듯한 바다 이름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제국주의 침략 행위를 성찰하지 않는 자들이 바다를 명명하고 규정하는 일은 다시금 위험을 배태시키고 또 관용하는 일이 될 게 자명하다.
‘있는 바다’가 날이 새면 후쿠시마 핵물질 방류로 ‘죽음의 바다’로 바뀔 판이다. 며칠 뒤면 113번째 맞는 국치일이다.(8.29.) ‘있는 바다’가 ‘없는 바다’가 되는 걸 축하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애국가 첫 마디 ‘동해물’에 핵물질을 쏟아붓는 걸 구경하고 있어야 한다니 젖먹이적부터 배우고 불러온 노래마저 가락을 옮겨갈 자리가 없다. 해 뜨는 바다 동해여, 눈물로 비나니 이 날을 두고두고 용서하지 마라. 이름 빼앗긴 저 바다에 떠오르는 아침 햇살마저 핵물질에 오염될 터이니 ‘동해물’을 앞세워 새로 무엇을 도모하고, 또 무엇을 기릴 수 있으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