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에서]
강남역에서
나는 보았다
한 여성의 죽음을.
강남역 화장실에서
나는 보았다
한 남성이 처음 보는 여성을 기다렸다가 해치는 것을.
서울에서
나는 보았다
혐오가 일상의 등에 칼을 꽂는 것을.
대한민국에서
나는 보았다
증오가 어둠 속에서 키득거리는 소리를.
밥상 위에서
나는 보았다,
학교에서
나는 보았다,
사무실에서
나는 보았다,
2천 년도 넘게 제련되어 온 혐오의 칼날이
2016년 어느 저녁을 찌르는 것을.
익명이 익명을 베는 것을.
나는 보았다,
증오가 인간 양심을 과녁으로 삼는 것을.
강남역에서
나는 보았다,
발기한 권태가
실패한 증오가 오직 혐오를 성공시키기 위해 부랑하는 것을.
나는 날마다 보았다,
혐오가 화장실에서 똥 묻은 자식을 낳는 것을.
자기 자신을 낳는 것을.
* 여기서 단지 한 여성의, 한 누이의 육체가 살해된 게 아니다. 오늘 인간 양심의 이름으로 혐오의 지배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걸 한 여성의 피 흘리는 죽음이 울부짖고 있다. 혐오라고 부르는 증오는 씨앗 없이 자라는 초목과 같다. 반유대주의, 빨갱이 사냥, 지역감정, 동성애 혐오 등은 다 이들의 오빠이자 아버지들이다. 혐오는 그 자체로 폭력이자 폭력의 인큐베이터다.
한국사회는 강남역이라는 공간의 보편성과 화장실이라는 일상성 안에서 한 여성의 육체를 살해함으로써 거대한 죽음을 잉태하게 되었다. 증오는 언제든 근거가 없다. 증오 자체가 근거일 뿐이다. 증오는 지배자가 지닌 확증편견과 더불어 인간양심의 대지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독초다.
증오를 증오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사회에서 한 여성은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혐오로 한 여성이 살해될 때 인류 전 역사에서 남근주의적 폭력이 저지른 모든 죽음이 함께 하는 것이며, 모든 양심이 함께 살해되는 것이다. 방관은 언제든 그 죽음을 공모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