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 뒤뜰에는 묵은 백송白松(천연기념물 제8호)이 한 그루 서 있다. 팔도에서 가장 굵고 기상이 높은 백송이다. 붉은 담장 바로 너머가 윤보선 고택이다. 여러 사람과 기관들이 이 터에 살거나 머물다가 떠났는데 백송만 의연하게 남아 있다. 낙락장송은 알고 있다 따위의 말이 이 백송 앞에 서면 한낱 객쩍은 소리가 아니란 걸 알 터이다.
백송은 옛적 연암 박지원 손자인 헌재 獻齋 박규수 대감집에 있었다. 헌재는 대동강에 들어온 제네럴 셔먼 호를 물리칠 때 평양감사였지만 척화파가 아니라 개화사상으로 청년들을 길러냈다. 침략선은 격퇴시켜야 마땅했지만 이양선과 이양선에서 내린 사람과 물건을 보고 오히려 개화를 지향했다. 연암에게 배운 바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의 집에 들락거리면서 새로운 생각에 몰입한 이들이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박정양 윤치호 오경석 유대치 홍영식들이었다. 주로 북촌 청년들로 구성된 개화당은 이렇게 백송 아래에서 태어났다.
헌재 박규수는 이 집을 자식이 아니라 아끼는 제자 홍영식에게 물려주었다. 여럿이 공부한 뜻도 함께 상속하고 전수하라는 의도가 깃들어 있었음직하다. 우정국 총판이 된 홍영식과 동지들은 친청 사대 수구당을 쓸어버리고자 조급한 시도를 한 나머지 사흘 만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삼일천하 갑신정변이다. 이 일로 완전히 멸문된 홍영식네 집이 흉가로 남게 되자 미국 선교사 알렌네들이 들어와 조선 정부 지원을 받아 제중원을 열었다. 병원은 외아문外衙門(외교통상부) 소속이었다. 두 해 뒤 구리개(을지로)로 옮겨갈 때까지 알렌 병원은 백송 옆에 있었다. 개화가 움튼 자리에 첫 양식병원이 들어선 것이다. 땅에는 확실이 어떤 내력이 있다.
제중원은 이 터와 집을 신식 화약 도입, 화폐 발행에 나선 적이 있고 독립협회 초대 회장까지 지냈건만 끝내 친일로 기운 경무사(경찰청장) 안경수에게 큰 돈을 받고 넘겼다. 그가 모역사건과 관련하여 처형당한 뒤 이윤용(이완용의 양형養兄. 이완용은 이호준 양자로 입적했는데 위로 형이 있었음)이 한 동안 집을 소유했다. 광제원 또한 1900년 말부터 여덟 해 가까이 이곳에 있었다. 최린과 이상재도 헌법재판소 정문께에서 셋방을 살았다. 이상재는 이 재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러 기록이 겹치는 건 열 군데(필지) 남짓 되는 공간에 사람들과 기관이 들어와 거처로 삼은 까닭이다. 조대비 집안도 여기 살았고 흥선대원군이 된 이하응도 자기 집(운현궁)에서 지척인 이곳에 와서 아들을 왕으로 올릴 일을 꾸몄는데 백송과 얽힌 일화도 전한다. 오늘날 헌법재판소 같은 공간으로 획정된 건 이윽고 운현궁 건너편에 있던 경기고녀(경기여고)가 옮겨온 뒤부터다. 광복 직후 경기여고 강당에서는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선인민공화국 선포대회가 열렸다. 이른바 인공이다. 경기여고가 광화문으로 옮겨간 뒤에는 창덕여고가 옮아왔다. 여러 기관과 세력이 들고 나는 동안에도 백송은 다만 같은 자리에 있었다. 제중원이나 경기고녀 기록에도 백송 관련한 내용은 두루 나오고 있다.
‘재동여고(경성여자고보) 기숙사는 옛날 유명한 박정승(박규수)의 집터이다. 그 뜰에 있는 백송은 수령이 육백년 쯤 된 조선에 드문 진목珍木으로 본디 박정승집 중사랑 뜰에 섰던 것이다.’ 박학했던 호암 문일평의 언급이다. 이 기록에 따르자면 그가 글을 쓴 지 백여년이 지났으므로 백송은 칠백 살을 묵은 셈이다. 이 백송이 지금은 헌법재판소를 지켜보고 있다.
헌법재판소 내력은 그 자체로 시민혁명 역사와 동행한다. 4.19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 헌법은 아시아 최초로 헌법재판소 설치를 명문화했다. 대한민국헌법 제4호(1960.6.15) 제8장은 헌법재판소 설치에 관한 조항으로 제83조의 3과 4에 이를 명시하고 있다. 제78조는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선거로 뽑도록 했다. 현행 헌법보다 ‘사법 재민’의 민주성이 높았던 이 조항들과 가치는 한 번도 실현해보지 못한 채 5.16쿠데타로 좌절되었다. 군사정권은 제헌헌법 이래 유지되어 오던 이익분점권을 포함하는 노동4권 또한 노동3권으로 축소시켰다. 애초 제헌헌법 제정 당시에 근로자 경영참여권을 보장하는 노동5권을 놓고 다투다가 4권으로 결정이 났다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제헌헌법을 논의하고 구성했던 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고도의 상식에 부합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1972년 헌법재판 기능을 위해 만든 헌법위원회는 1987년 개헌으로 폐지될 때까지 단 1개 사건도 처리하지 않는 욕스러운 기록을 세웠다. 헌법재판소가 부활한 것은 6월시민항쟁(1987)으로 탄생한 현행 헌법 체제 아래서다. 헌법재판소가 이름을 얻은 것이나 활동을 개시한 건 이렇듯 알알이 시민혁명에 빚지고 있다.
백송 일대는 개화공간, 근대 병원, 여성교육기관, 건국준비, 헌법재판이라는 공공 가치가 켜켜로 누적된 곳이다. 봉건을 넘어서고자 하는 뜻에서부터 헌법재판까지 실로 촘촘히 빼놓을 수 없는 내력을 지니고 있는 터전이다. 백송은 이 모든 걸 서서 보았다. 땅이 스러질 수 없듯 이 전통 또한 이어질 것이다. 백송 밑에 다시 술 한 잔을 올릴 날을 기다린다.
헌재 앞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면서 답답한 마음에 짧은 글을 덧붙인다.
| <재동 백송> 재동 백송 칠백년 묵어 술도 받아먹고 비손도 잡수시는데 올해는 흰 솔잎이 더욱 희것다. 백송 서 있는 헌법재판소 돌 울타리 너머로 다투어 봄을 비는 사람들 황사 속에 하루에도 몇 번씩 조마조마 흰 머리칼 보태는 까닭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