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통상임금’ 문제와 관련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이 방미(訪美)기간 중 이 문제에 대해 “합리적인 해법을 찾아보겠다”고 언급하면서 이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노동계와 야당 등은 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고 있지만 재계는 환영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상여금의 통상임금 포함여부다.

근로기준법 시행령 제 6조는 ‘통상임금’을 “근로자에게 정기적으로 일률적으로 소정근로 또는 총 근로에 대해 지급하기로 정한 시간급 금액, 일급 금액, 주급 금액, 월급 금액, 또는 도급 금액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만약,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면 통상임금액을 기초로 산정되는 초과 근무수당과 퇴직금 등이 크게 늘어날 수 밖에 없다.

통상임금 문제가 이슈로 떠오른 것은 금아 리무진 노동자들이 제기한 통상임금 관련 소송에서 대법원이 지난해 3월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된다”고 판결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는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해온 고용노동부의 ‘통상임금 산정지침’과는 큰 온도차를 보이는 대목이다.

이같은 판결이 나오면서 다른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통상임금’ 관련 소송이 잇따랐다. 한국GM과 삼성중공업, 현대자동차 등 현재 60여개 노조가 제기한 소송이 진행중인 상황이다. 금속노조에 따르면 한국GM노조는 1, 2심에서 “정기상여금 등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 중이던 지난 8일 미 상공회의소 주최 CEO라운드 테이블에서 한 발언이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 지난 8일 미 상공회의소 주최 라운드 테이블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 청와대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당시 댄 애커슨 GM 회장은 “한국에 8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하려면 통상임금 문제를 한국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고 이어 박 대통령은 “최대한 합리적인 해법을 찾아보겠다”고 답한 것으로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이 전했다. 이에 애커슨 회장은 크게 안도하며 80억 달러 투자를 재확인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통상임금을 둘러싼 노사간의 갈등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박 대통령의 발언이 자칫 재계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미 통상임금에 대한 대법원의 판례가 나온 사안을 대통령이 재검토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해당 발언이 나오자 노동계는 물론 야당도 강하게 반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 9일 논평을 내고 “대통령이 GM 회장의 문제제기에 공감한 것이라면 사법부의 판단을 거스르겠다는 것으로 매우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며 “나아가 외국대기업의 투자축소 위협에 굴복해서 스스로 공언한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라는 시대적 과제에 역행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민주노총은 “오늘 대통령의 발언이 재계와 사법부 및 행정부에 잘못된 신호로 전달돼 장시간 노동과 왜곡된 임금체계를 고착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노동계의 저항은 물론 역사적 책임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배재정 민주당 대변인은 10일 현안브리핑을 통해 “신규인원 채용 대신 기존인력에게 시간외 수당을 지급하며 장시간 노동을 시키는 잘못된 고용관행에 대해 사법부가 제동을 걸고 있는데 대통령이 사법부의 고심을 외면하고 외국기업의 투자를 명분으로 기업의 일방적인 요구를 수용하려는 태도는 온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배 대변인은 “특히 대통령의 발언은, 많은 소송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사법부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려는 제왕적 태도이자 헌법이 정하고 있는 삼권분립을 위배하는 것”이라며 유감을 표시했다.

한국 GM의 전신격인 대우자동차의 노조대표를 지낸 홍영표 민주당 의원은 이날 오전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통상임금 문제는 법적다툼이고 대법원에서 최종판결이 났지 않나. 그럼 정부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야당 간사이기도 한 홍 의원은 “일부 기업이 심각한 타격을 받아 경영상에 문제가 생길 정도라면 노사간의 대화나 사회적 합의를 통해 다른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며 “대법원의 판결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행정부의 태도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나타냈다.

반면, 통상임금 문제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부정적인 입장이던 재계는 박 대통령의 발언에 은근히 기대를 갖는 눈치다.

이형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노동정책본부장은 13일 YTN 라디오 ‘전원책의 출발새아침’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우리 경제와 경제침체에 (통상임금 문제가) 큰 부담이라는 취지에서 말씀하신 것 같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대통령께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본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또한, 이 본부장은 “특히 지금 국내 투자여건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부담감을 해소하기 위한 차원에서 답변하셨다는 생각이 든다”고 평가했다. 그는 “산업현장에서 그간 노사합의나 관행으로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노사 모두가 인식해왔는데 법원이 갑자기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막대한 기업 부담을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본부장은 “상식선으로도 상여금 같은 경우에는 ‘보너스’라는 용어를 써서 월급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며 “그런데 이제부터는 기업들이 각종 명목의 급여에 대해서 법원으로부터 판단을 받아야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참 심각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통상임금이 상여금에 포함되면 기업 입장에서는 어느정도 부담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 본부장은 “최소치로 추산한 바로는 근로자에게 직접 지급되는 수당이나 퇴직금 증가분에데가 각종 사회보험료 부담 등을 합쳐서 3년치 소급분이 약 38조(원) 가까이 나오고 있다”며 “매년 추가적으로 약 8조씩 부담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날 같은 방송에 출연한 김은기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본질은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당연히 지급해야 하는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체불했다는 것”이라며 “경총은 3년치 소급분을 38조로 잡았는데 임금채권의 소멸시효가 없었다면 어마어마한 금액을 체불했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김 국장은 “노동부가 88년부터 통상임금 산정지침을 고시로 발표했는데 여태껏 통상임금에 상여금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발표했고 지난해 3월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또 한번 고시를 개정했는데 그 때도 상여금 규정은 개정하지 않았다”며 “이에 따라 사용자 측은 노조의 협의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소송까지 이르게 된 과정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반면 법원은 통상임금 범위를 계속 확대해왔다. 94년도에는 육아수당 같은 경우도 포함시켰고 96년도에는 교통비나 휴가비도 포함시켰다”며 “결국 지난해에는 고정상여금도 통상임금으로 봐야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머니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날 방미 성과 관련 기자회견에서 “(통상임금이)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며 “정부는 이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갖고있고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중”이라고 밝혔다.

애커슨 GM 회장의 발언과 관련해서는 “통상임금분야는 산업현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좋은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며 “안되면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겠다거나 하는 얘기는 아직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빠르다”는 생각을 나타냈다.

한편, 이날 <뉴스1>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부장판사 최주영)는 근로복지공단 소속 일반직 5급직원 조 모씨가 서울지방노동청 북부지청을 상대로 낸 통상임금 결정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고 밝혔다.

반면, 인천지법 민사11부(부장판사 김범준)은 운수업체인 삼화고속 전, 현직 근로자들이 “통상임금에 근속수당과 식대수당, 상여금 등을 포함시켜 달라”며 회사 측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상여금은 포함되지 않고 근속수당과 식대만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갑론을박’ 속에서 ‘통상임금’을 둘러싼 논란이 어떠한 해법을 찾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