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권력에서 축출.. 미완의 투쟁 완성하는 것”
법을 공부하고 법으로 밥벌이를 하면서 늘 의아스럽고 동시에 심한 갈증을 느낀 게 법치주의라는 말의 쓰임새였다. 교과서에서 배운 바, 법치주의는 권력의 행사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 자유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기 위한 원리다. 이게 무슨 학설의 대립이 있는 논쟁의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학부에서 전공이든 교양이든 (헌)법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운 것 일게다.
그러나 교과서 밖에서 통용되는 법치주의의 의미는 다르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반대다. 원래의 법치주의가 권력을 향한 것인데 막상 현실에서 쓰이는 법치주의는 국민을 향해있다. 국민더러 법 잘 지키고, 데모하지 말고 정부 욕하지 말라고 할 때 법치(주의)는 향용 따라붙는 수식어다.
난 이게 정말 이상했다. 석학이 쓴 교과서, 석학이 강의하는 교실에서의 법치주의 의미가 막상 교과서 밖, 강의실 밖에서는 정반대로 물구나무서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말이다. 더 기가 막히는 건 법치주의가 실제 국민들을 겁박하고 입다물 게 하는 요술방망이가 되는 현실이었다.
역대 법무장관 검찰의 신년사를 검색해 본 일이 있다. 항상 빠지지 않는 말이 ‘법치의 확립’이다. ‘자유민주질서’, ‘불법적 떼쓰기 근절’도 세트로 같이 출현한다. 검찰총장도, 법무장관도 다 고시공부 할 때 헌법공부하고, 법치주의를 배웠을텐데 이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헌법을 배운 것일까? 북한헌법인가?
사실 법치주의가 제 의미대로 자리 잡았더라면 박근혜의 저 황당한 모습들은 이미 제어 됐을 것이다.
왜 우리나라의 법치주의는 이렇게 물구나무선 것일까? 난 그게 우리 슬픈 현대사에 이유가 있다고 본다. 식민과 분단, 전쟁, 그 전쟁이 더욱 공고화시킨 분단체제가 주는 공포, 억압 속에서 마땅히 나라의 주인이어야 할 시민은 국가권력 앞에 숨죽여야 했다. 뜻 있는 사람들이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그 저항의 역사가 87년 헌법으로 꽃피우기는 했으나 대개는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다만 다음 저항의 거대한 밀알로 남았던 것이 우리 현대사다.
법치주의를 확립한 나라들은 공통점이 있다. 권력자를 끌어내린 경험이 그것이다. 시민 혹은 민중의 힘으로 권력자를 축출했느냐 하는 건 사실 근대시민혁명의 본질적 구성요소이자 법치주의가 본래의 의미대로 구현되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 필수적 요소다. 법치주의가 권력을 통제하는 원리라고 하는데 본질적 징표가 있다는 것도 법치주의가 권력자를 축출하고 난 바로 그 토대위에서 세워진 가치체계라는 점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런 경험 없이 법치주의라는 형식적 틀만 차용했던 독일과 일본이 전체주의로 흘렀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이승만을 끌어내린 경험을 갖고 있으나, 그것이 온전히 시민의 힘이었는가 의문이거니와(미국의 영향력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분단이라는 외적 제약과 친일청산의 좌절로 인해 시민혁명의 토대가 극히 미약했기에 결국 5.16군사쿠데타로 전복됐던 것이다.
여전히 분단체제는 강고하다.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뿌리 역시 질기게 이어져 우리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의 역량은 4.19와 비교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박근혜를 권력에서 끌어내리는 건 4.19, 부마, 광주, 그리고 6월항쟁 등 그간의 미완의 투쟁을 완성하는 것이며 우리 법치주의에서 흠결된 ‘시민의 힘에 의한 권력자 축출’이라는 요소의 완성이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시민이자 법률가로서 나는 지금 역사를 살고 있다. 가슴 벅찬 상황이다. 비록 슬픈 현대사이지만 그래도 강고한 국가권력 앞에 하나의 계란이 되어 깨져갔던 선배들이 계셨기에 지금 우리가 정의로운 나라를 꿈꿀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사는 역사가 우리의 후세들에게 자랑스런 민주공화국, 권력자의 권력행사를 꼼꼼히 체크하는 법치국가의 찬란한 이정표요 등대가 될 것으로 믿는다.
지금 우리는 역사를 살고 있다.
* 이 글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이광철 변호사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로, 본인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싣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