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과 칼]

지식분자들은 알아야 한다. 자신이 평소에 누려온 혜택이란 국가와 사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용기를 보이라는 조건부 존경이라는 걸. 국난에 처한 지금, 정의를 향해 말하고 행동하고자 하지 않는 자들은 적어도 자기 명예는 내려놓거나 버려야 한다. 주저 말고, 지체없이, 기탄없이 이 국면을 돌파하는 척후여야 하는 게 오늘 이 땅 지식사회와 지식인의 사명이다.

수구 스스로가 강구한 방어적 특검 따위에 매몰되어서는 종국적 결말에 이를 수 없다. 파국 없이 창조적 시작 또한 없다. 더 기다릴 것 없다. 성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창잡이는 철학자도 되지 못하고 다음 전투도 없다. 벌써 죽었기 때문이다. 지혜는 행동을 위한 예령이지 사유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지금이 그렇다.

근육이 없는 지식은 사치품 아니면 사기 둘 중 하나다. 우리의 사상은 늘 몸뚱어리를 필요로 한다. 뇌수만 가지고 미래를 건설할 수는 없다. 어떤 공화정도 공짜인 적이 없었다. 9번 개헌 역사에서 오직 4.19와 6월항쟁으로 얻은 헌법만이 진보였다는 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나머지는 헌법을 내세운 폭압이었을 따름이다. 공화정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말 뿐 아니라 그대의 땀과 피를 더하라. 헌법 조문은 오직 시민의 피와 땀으로만 돋을새길 수 있다.

예령은 끝났다. 이미 동령이 내렸다. 어떤 역사도 미리 지시어를 갖지 않는다. 미처 오지 않은 세상을 여는 방향은 대중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혼돈이 아니라 창조다. 나중에 말하는 진리의 주인공일 때 지식분자는 잘해야 시대의 구경꾼이거나 자칫 배신자 노릇을 면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의 사명은 한가롭게 강단의 잉크와 먹이 아니라 시대의 어둠을 붓에 묻혀 찍어 쓰는 일이다.

하물며 묵향을 그릴 때도 다르겠는가. 난잎이 칼을 품지 못하면 한낱 풀잎에 지나지 않고, 칼이 난을 도모하지 않으면 하물며 피묻은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붓이 칼을 닮고, 칼이 붓을 자못 사모하도록 하되, 그 쓰임이 서슴없어야 한다. 물결을 두려워하지 않고 배를 띄우는 사공만이 먼 바다에서 밤을 도와 돌아올 수 있다. 파도에 갇혀 웅크린 뱃사람은 아무도 귀환하지 못했다. 창잡이와 사공과 지식분자의 운명이 두루 이러하다.

▲ 서해성 작가(성공회대 교수)

이 모든 언어의 비밀은 한결같다. 이 대지에 새로 깃들 한 뼘 자유를 위하여 바야흐로 붓을 칼로 벼리어낼 때다. 옛 가락이 전하거늘, 시호시호時乎時乎 이내 시호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붓노래가 칼노래를 닮아야 몹쓸 세상을 베어낼 수 있으렸다. 한낱 날카로운 비판에 그치지 말고 붓과 몸을 떨쳐일으켜 내일을 쳐서 오늘로 가져와야 하질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