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23석 확보로 원내 제1당을 차지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당선의원들이 14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참배를 하기위해 현충탑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한국에서 야당 성향 지지자들은 집권세력의 주요 인물들이 미워서 투표장으로 향한다. 반면 친여 성향 유권자들이 결집하는 이유는 사실 야당의 간판 정치인들 때문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소위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유권자들은 인터넷이나 SNS 뿐만 아니라 때로는 사적인 대화에서 ‘선지자인척’하는 진보 성향의 친구들이 밉쌀 맞아서 묻지마 1번 투표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2014년 세월호 사태 이후 수 차례 재보선에서 야당이 참패한 것이 이런 심리를 설명한다.

정치 성향을 떠나 똑같은 사람인 이상, 이들도 세월호 침몰 직후에는 줄을 가득히 이어가며 추모 행렬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후 페이스북과 같은 SNS에서 추모가 정치적 비판으로 변형돼 가득해 지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묻지마 형태로 1번에 몰표를 주는 행태를 지속해 왔다. 그런 행태가 이번 총선에서 드디어 사라지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런 여당 지지자들 성향을 살펴보면 더불어민주당의 이번 제1당 부상이 자동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중간과정에서 수차례 시험대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마다 더민주당의 선택이 달랐다면 지금의 승리는 없을 뻔 했다는 얘기다.

첫 번째 계기가 바로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다. 필리버스터의 초기에는 물론 야당의 지지세력을 모으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정권의 소통불가 행태를 모든 국민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것이 “오늘은 또 누가 새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라는 형태로 일주일 넘게 지속되면서 또다시 야당이 자기 함정에 빠지는 듯한 분위기도 일부 나타났다. 여당 성향 지지자들이 “너희는 떠들어라. 우리는 몰표한다”는 냉소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 얘기할 때는 입 꾹 다물고 대화에 대한 반감을 숨기는 사람들이다.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들만의 대화에서만 온갖 험담을 늘어놓기도 하다가 높은 투표율로 한 번호만 수십년 찍어온 사람들이다.

필리버스터는 9일을 지속하고 종료됐다. 많은 야권 지지자들에게는 깊은 아쉬움을 남겼고 또, 종료가 너무 급작스런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보다 더 오래 지속될수록 야당의 수렁이 깊어질 수도 있는 찰나의 갈림길이었다.

이 순간의 결정은 전통의 야권지지자 뿐만 아니라 중도의 유권자들에게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간 첫 번째다.

비례대표 파동은 산통 다 깨는 듯한 최대 위기였다. 하지만 수습과정이 만점은 아니더라도 모처럼 잡은 흐름을 놓치는 일은 막는 쪽으로 이뤄졌다.

여당은 불리할 때 무릎 꿇는 모습으로 대중정서를 자극하는데, 더민주당과 같은 야당에게 이와 비슷한 작용을 하는 것은 머리가 흰 연장자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유권자들의 전략적 투표까지 더해져서 더민주당은 힘든 상황에서 제1당을 차지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지금까지 국민들에게 서러운 점이 있다하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나라의 정치세력도 받기 힘든 엄청난 은혜를 국민들로부터 입었다.

관건은 앞으로 이것을 잘 지켜나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988년 최초 여소야대를 가져온 총선처럼 야권이 승리한 이후에는 정치권뿐만 아니라 민간으로부터도 엄청난 개혁 요구가 쏟아져 나온다.

이런 것은 개혁 의지의 밑바탕이 되기도 하지만, 중도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쉽게 ‘개혁 피로감’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백화제방으로 나오는 얘기들의 우선순위를 잘 가려서 지금 단계에서 적합한 것들 위주로 정치력을 집중시킬 필요가 절실해 진다.

총선 거쳐 대선을 거치는 승리를 차지하려면, 지지층이 가장 넓은 범위에 분포해 있어야 한다. 자신들의 골수 지지층 결집력은 높이고 상대의 결집력이 느슨해져서 승리를 얻는 2002~2004년과 같은 승리는 극히 예외적이다.

기득권층에 대한 솟구치는 분노가 위대한 승리의 순간을 만들었지만 분노의 에너지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2004년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는 과반수를 얻는 놀라운 승리를 거뒀지만 총선이 끝나자마자 한데 모였던 에너지는 사라지고 외연을 넓힌 한나라당의 연이은 재보선, 그리고 지방선거 공세에 전부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2007년 정권을 내주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는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야당도 순간의 분노가 아니라, 폭넓은 지지층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승리를 추구해야 할 때다. 대안 집권세력으로 성장하려면 그런 전략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이제부터 쏟아지는 한마디 한마디에 더민주당까지 덩달아 일일이 목청을 높여서는 지금의 에너지를 오래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