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남영동1985, 독재시대 고문 참상 고발
“많은 이들이 여기서 생각을 고쳐잡고 나갔죠”. 낯선 이들이 회유한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한 남자는 이렇게 답한다. “여기가 남영동입니까?”
350만 관객이 관람한 영화 <부러진화살>을 통해 사법부의 무능과 부패를 알렸던 정지영 감독이 다시 한 번 무게감 있는 주제를 세상에 던졌다. 이번에는 5공시절 자행된 반인륜적 고문을 소재로 한 영화 <남영동1985>. 제목이 상징하듯 이 영화는 1985년 남영동 치안 본부 대공분실에서 22일간 고문을 당했던 고 김근태 의원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1985년 9월 4일 민주화운동가 김종태(박원상)는 가족들과 목욕탕을 다녀오던 길에 경찰에 연행돼 어딘가로 끌려간다. 김종태가 도착한 곳은 고문으로 악명높은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 대공분실 총책임자 윤사장(문성근)은 “협조해주시면 이 안에서의 안전은 물론이고 나가서도 편안하게 해드리겠다”며 체제 전복 기도를 했다는 허위 자백을 요구한다. 이에 맞서 김종태는 “반국가 단체 활동을 한 적이 없다”며 당당한 눈빛으로 거짓 진술을 거부한다.
“같이 버텨달라”는 박원상 주연배우의 말대로 이 때부터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상당한 고통을 참아야 한다. 영화가 22일간 김종태가 겪게 되는 끔찍한 경험에 초점을 맞추며 고문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고문기술자 이두한(이경영), 박전무(명계남)는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고문 등 온갖 종류의 고문을 가한다. 영화의 시선 역시 남영동 대공분실을 거의 벗어나는 법이 없다.
가장 악독한 고문기술자인 이두한은 “난 서두르지 않아요. 천천히 합시다”라며 휘파람을 불어가며 ‘공사’(고문)를 자행한다. 강과장(김의성), 김계장(이천희), 백계장(서동수)은 이들의 고문을 충실히 돕는 역할을 한다. 때로는 야구경기, 권투경기 라디오를 들으면서 고문을 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고문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직업이자 애국심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김종태 역시 계속되는 고문에 점차 혼란과 분열을 일으킨다. 육체의 고통 앞에 내면의 자아는 점차 무너져 간다. 나약해진 자신을 부여잡고자 안간힘을 쳐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고통뿐이다. 고 김근태 의원의 아내인 민주통합당 인재근 의원은 시사회장에서 이 영화에 대해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다. “너무 힘드시면 눈을 감으셔도 되고요. 눈물이 나면 눈물을 흘리셔도 되고요. 울음이 나면 우셔도 됩니다. 우리에게 그만큼의 자유는 있습니다”
세월은 흘러 영원할 것 같던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화된 정부가 탄생한다. 국가 체제 전복을 기도했다던 ‘빨갱이’ 김종태는 국회의원이자 장관이 되고, 독재정권에 충성한 ‘애국자’ 이두한은 교도소에 수감된다. 하지만 끔찍한 고문의 기억은 쉬 사라지지 않고, 김종태는 여전히 고통을 겪는다. 그 고통을 잊기 위해서였을까? 장관이 된 김종태는 교도소에 수감된 이두한을 찾아간다. 20년만에 두 사람은 정반대의 입장으로 다시 조우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울려퍼진 고문기술자 이두한의 휘파람 소리, 엔딩 크레딧과 함께 등장하는 실존 고문 피해자들의 증언은 <남영동 1985>가 2012년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를 전해준다. 정지영 감독은 당부한다. “영화를 찍은 우리는 2달동안 너무 아팠다.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김근태 의원은 평생을 아파하셨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2시간만 아픔을 견뎌달라”. <남영동 1985> 22일 개봉, 러닝타임 106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