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뉴시스>

영화를 보러가면서 잠시 공상에 잠겼다. <소수의견>은 다 만들어놓고 무려 2년을 묵힌 영화다. 중간에 제작사도 변경되는 등 곡절도 많았고, 완성 후에도 개봉이 안 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시네마 서비스가 배급에 나서면서 다행히 어찌어찌 개봉은 하게 되었다. 2년이면 꽤 긴 시간이다. 그 사이에 영화가 대폭 ‘낡은 영화’가 되어 있기를, 사법부의 현실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면서 그러니까 최소한의 원칙은 통하는 곳이 되어 관객으로 하여금 ‘에이, 옛날에나 저랬지’ 하는 관전평이 나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격세지감’을 느끼며 돌아오게 되기를, 저게 영화이며 이미 과거의 일이니 다행이라 여기게 되기를 말이다.

용산참사를 연상시키는 영화는 디테일 하나, 배역 하나하나까지 공들인 현실감이 잘 조율돼 있었다. 배우들 한 명 한 명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기억해 주고 싶을 정도의 감명을 받았다. 영화는 희생당하는 쪽과 희생을 강요하는 쪽 모두의 두 개의 안간힘을 잘 표현했다. 치우치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냉소하지 않으면서 논리 대결로 이끈 대사들도 대단했다. 법정 장면이 많은데도 빠져들어 보았다. 배우들은 진짜 그 직업현장에서 캐스팅해 온 사람들 같았다. 실은 도무지 배우처럼 보이지 않는, 생활감까지 느껴지는 모습들이었다.

다만 나의 공상만은, 행복하고 허황된 것이었다. 화가 났다. 영화는 2년간 창고에서 묵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지금 여기의 이야기였다. 날 것이었다. 살아있었다. 너무 생생해서 바로 오늘 일 같았다. 아니다. 내일도 겪을 모레도 겪을 일 같았다. 혹시라도 ‘법’에 저촉되어 공판을 받게 되면, 누구랄 것도 없이 모든 ‘비 기득권’이 겪게 될 영원히 반복될 공고한 시스템의 쳇바퀴였다. 절대로 깨질 것 같지 않은 강고한 체제는 상상이상으로 강한 듯했다. 자체 점검과 ‘진화’를 수시로 거듭하고 있었다. 몇몇 소수의 사법 엘리트만을 위한 것이라는 본질만이 항구했다.

소수의 희생자를 ‘제물’로 바쳐 국가라는 이 거대한 시스템을 유지하자는 논리는, 근본적으로 거짓말이다. 희생자는 결코 소수로 끝나지 않는다. 제단에 올릴 이들의 피의 행렬은 유사 이래 그친 적이 없다. 그 희생이 소수였을까? 누구나 해당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다수의 문제다. 절대 자신을 0.0001%의 소수인 기득권과 동일시하지 말라고 영화는 끊임없이 관객을 각성시킨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상위권’을 골라내는 기준은 더욱 더 강화된다. 까다로움을 넘어 야비하기까지 하다. 의사도 다 같은 의사가 아니고, 변호사도 다 같은 변호사가 아니라는 싸늘한 비교의 눈이 수시로 사람을 잘라낸다.

그렇게 어떤 ‘권위’에 굴종시키려 한다. 맨 위 결정자는 결국 한두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부든 야당이든 시민 단체든 이 ‘등급’의 틀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열심히 하다 보면 ‘누구나’ 위로 올라가 ‘최고’가 될 것만 같기 때문일까. 그렇게 착각을 하는 순간, 내 식구가 희생 제물로 제단에 바쳐질 수도 있다. 아무도 모르게. 내가 현장에 없는 그 심연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비명 한 번 못 지른 채 말이다.

▲ 영화<소수의견> 예고편 캡처

네티즌 영화 평 중에서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히 받아들여야하는 대한민국의 법”이라는 문장을 읽고 나서 생각이 많아졌다. 파괴되고 박살나는 건 언제나 대다수 시민의 삶이 아니었을까. 영화 초반 철거 예정된 마을의 담벼락에는 빨간색 스프레이로 휘갈긴 이런 낙서가 씌어 있었다. “99% 국민 여러분, 다음 철거대상자는 여러분입니다.”

10대의 아들과 갓 스물의 아들, 두 아들은 폭력 속에 죽어갔다. 철거민의 아들과 의무 경찰이라는 ‘구분’만 남은 그들의 죽음. 무엇을 덮기 위해 누군가는 죽어야 하고 누구는 잡혀 들어가야 하는 각본은 사전에 이미 짜여진 듯 예정된 마무리를 향해 굴러간다. 두 아들은 죽고, 두 아비는 죄인이 되었다. 법정은 한 사람을 살인마로 한 사람을 희대의 희생자로 만들고자 했다. 과연 두 아비의 죄는 무엇인가. 시간을 거꾸로 돌려 다시 그 때 그 순간의 철거현장으로 돌아간다 해서, 이 힘없는 아비들은 아들을 구하고 제 몸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아버지들은 말없이 눈물만 떨군다. 대한민국에서 새끼들과 함께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리 불가능한 일인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가에 ‘봉사’했던 홍재덕 검사(김의성 분)는 국가배상청구를 진행한 윤진원 변호사(윤계상 분)에게 말한다. 당당히 아주 당당히. “끝까지 들어. 누가 나한테 전화라도 했을 거 같아? 난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아. 내 단독으로 움직인 거야. 국가라는 건 말이다. 누군가는 희생을 하고 누군가는 봉사를 하는 거야. 박재호는 희생을 한 거고, 나는 봉사를 한 거지. 그런데 넌, 넌 뭘 한 거지? 니가 아는 게 뭐야? 임마.”

▲ 영화<소수의견> 예고편 캡처

형량으로 ‘거래’를 하며 사건을 덮고 무마하려던 검사는,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절대로 기가 눌리거나 ‘승승장구’하던 인생이 실패를 겪게 되지 않는다. ‘옷’을 벗으면 알아서 전관예우로 모셔가는 대형 로펌이 있고 그의 사건 수수나 돈벌이에는 따로 수많은 ‘배려’와 ‘보은’이 따른다. 그가 ‘봉사’해 온 대가로 말이다. 공직자가 돼선 안 되는 수준의 결격사유가 있어서 물러난 자가, 어떻게 대형 로펌의 변호사로 곧장 직행할 수 있는 것인가? 법의 적용과 집행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범법’을 저질렀는데, 왜 직분을 바꿔 오히려 더 많은 돈을 벌 새로운 자리로 등극하게 되는 것인가? 검사로 있을 때보다, 변호사가 되어 신수가 훤해진 극중 홍재덕을 보면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법은 다수를 위한 게 아니다. 원래 설계부터 소수의 기득권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심지어 현실적 액수인 100억도 아닌 ‘국가배상청구액 100원’ 같은, 진실만 밝히면 되니 돈은 필요 없다는 식의 ‘상징’마저 실은 다 힘없는 자들의 것이다. 한 번도 권력을 가져보지 못한 자들이 벼랑 끝에서 내는 신음소리일 뿐이다. 청구액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이어야 한다.

▲ <사진제공=뉴시스>

2년을 창고에 묻혀 있었던 영화 <소수의견> 앞에서, 진심으로 울고 싶어지는 사실은 따로 있다. 그 사이에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이 영화가 2년 전에 제때 개봉했다면, 우리는 세월호의 침몰을 막을 수 있었을까? 최소한 아이들을 몇 명이라도 더 구조할 수는 있었을까? 다 부질 없는 회한 앞에서 그저 목이 메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