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거란 침입을 쳐부순 양규 김숙흥네들을 위한 진혼
산이 에운 너른 벌판
쑥물 든 이수평梨樹坪에 눈이 내렸다.
겨울 비가 퍼부었다.
고려 통주 땅
쑥밭 애전艾田.
화살이 떨어지고 창이 부러지고 칼이 동강나서
싸움이 비로소 그대들을 떠났을 뿐
쑥밭재 너머로
거란 왕이 바삐 도망치는 말발굽소리 듣고서야
쑥대 사이로 파고드는 눈발처럼 쓰러졌구나.
죽어서야 처음 몸을 쉰 사람들.
그대들이 흘린 피가 아직 마르지 않았을 때
봄이 오고 쑥밭은 곧 푸르렀으리라.
길을 내주지 말아라.
왕을 잡아라.
묶인 동포들을 풀어내라.
갈라 터진 목소리 한 줄기마다 쑥 한 포기씩 돋아났구나.
옛 책갈피 사이로 지나는 이 있어
천년 지난 겨울밤에 겨우 문자로 쑥 한 줌 흩뿌려
알지 못하는 그대 이름들을
코끝 타도록 향기로 들이마신다.
*쑥밭 애전艾田
압록 동쪽 강동6주, 지금 평안도 땅 통주성(삭주)을 나와 강을 건너면 무학산이고 다시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구성龜城에 속한 애전艾田이 나온다. 왼쪽은 운봉산, 오른쪽은 장현이다. 산이 에운 곳에 자리 잡은 너른 벌판이 이수평이고 애전은 거기 있다. 애전이란 쑥밭을 한자로 쓴 지명이다. 운봉산 위로 애전현, 곧 쑥밭재가 있다.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네들은 두 번째 쳐들어온 거란 임금과 맞서 싸우다 화살이 떨어지고 창이 부러지고 칼이 동강나서 싸움을 그쳐야 했다. 두 장수와 고려군은 쓰러졌지만 거란 왕이 쫓겨간 싸움이었다. 양규는 쑥밭에서 싸웠을까, 그들이 쓰러져서 쑥밭이었을까. 소월金素月이 거기 태어나 쑥밭이 두고두고 천년 만에 울었구나.
| *현종의 교지 以功, 贈工部尙書, 給規妻殷栗郡君洪氏粟, 授子帶春校書郞, 王手製敎, 賜洪氏曰 “汝夫, 才全將略, 兼識治道. 常效節於松筠, 竟輸誠於邦國, 忠貞罕比, 夙夜忘勞. 昨於北境有戎, 中軍鼓勇, 指揮士卒, 威騰矢石, 追捕仇讎, 力靜封疆. 抽一劒而萬夫爭走, 挽六鈞而百旅皆降, 自此, 城鎭得全, 情懷益壯, 累多捷勝, 不幸隕亡. 常思出衆之功, 已加勳秩, 更切酬勞之念, 增及頒宣. 歲賜汝稻穀一百碩, 以終其身.” 贈叔興將軍, 又命給其母李氏粟, 敎曰, “贈將軍叔興, 自守邊城, 勇於赴敵, 旣成功於破竹, 終致命於伏弢. 言念舊勞, 合加優賞. 可歲給其母粟五十碩, 以終其身”. 전공으로 (양규에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추증하고 지어미 은률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는 곡식粟을 지급하였으며, 아들 양대춘楊帶春은 교서랑校書郞으로 임명하였다. 왕은 손수 교서를 지어 홍씨에게 하사하여 이르기를 “그대 지아비는 뛰어난 능력으로 장수로서 지략을 갖추었고, 또한 올바른 지도력을 알고 있었다. 늘 소나무처럼 푸르고 대껍질 같이 단단한 절개를 지니고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으니 충정은 비할 바가 없도다. 그는 이른 아침과 밤을 잊고 일하였다. 얼마 전 북쪽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군을 고무하고 용감히 나아가 사졸들을 이끄니 위세가 날으는 화살과 돌보다 등등하였다. 원수仇讎를 쫓아가 사로 잡으니 그 힘으로 이 땅을 안정시키게끔 하였다. 한 번 칼을 뽑으매 일 만 적군이 다투어 달아나고 강한 활六鈞을 잡아당기면 백여 군대가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성城과 진鎭이 온전할 수 있었으니 병사들의 씩씩함은 나날이 장하여갔다. 승첩을 거듭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전사하고 말았도다. 늘 출중한 공을 생각하고 이미 벼슬을 올렸으나 다시 노고를 보답코자 하는 뜻으로 이를 더하여 널리 알리고자 한다. 그대가 살아 있는 동안 해마다 벼와 곡식 1백 석을 내려주겠다.” 숙흥金叔興에게는 장군을 추증하고, 또 명령하여 어머니 이씨에게 곡식粟을 지급하게 하면서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증직 장군 숙흥은 변방 성을 지킬 때부터 용감히 적을 무찌르고자 나아갔으니 이미 대나무를 칼로 쪼개 듯 적을 쳐부순 공을 세웠으나 결국 복병의 활伏弢을 맞아 목숨이 다했도다. 옛 노고를 기려 말하노니 마땅히 후한 상을 더하고자 하노라. 해마다 곡식粟 50석을 지급하되 평생토록 하라.” *고려사절요를 찾아 읽는다. 신묘일. 거란契丹 군주가 스스로 보병과 기병 4십만명을 거느리고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 호명하며 압록강을 건너와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였다. 순검사巡檢使인 형부낭중刑部郞中 양규楊規가 진사鎭使인 호부낭중戶部郞中 정성鄭成, 부사副使인 장작주부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 판관判官인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와 더불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거란이 거짓으로 강조康兆의 서신을 꾸며서 흥화진에 발송하고는 항복을 권유하였다. 양규는 말하기를 “나는 왕의 명령을 받고 온 것이지, 강조의 명령을 받았던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항복하지 않았다. 다시 노전盧戩과 합문사閤門使 마수馬壽로 하여금 격문을 가지고 통주通州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도록 하니 성 안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중랑장中郞將 최질崔質과 홍숙洪淑이 소매를 떨치면서 일어나 노전과 마수를 붙잡고, 이내 방어사防禦使 이원구李元龜, 부사副使 최탁崔卓, 대장군大將軍 채온겸蔡溫謙, 판관判官 시거운柴巨雲과 더불어 성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키자 사람들 마음이 곧 하나가 되었다. 경신일. 양규가 흥화진에서 병사 700여명을 거느리고 통주에 이르러 병사 1천여명을 수습하였다. 신유일. 곽주郭州로 들어가 거란의 남은 병사들을 공격하여 모두 목을 베고 성 안에 잡혀 있던 고려 사람 남녀 7천여명을 통주로 옮겼다. 이날에 거란 군주가 서경西京을 공격하였다가 함락시키지 못하자 포위를 풀고 동진하였다. 임진일. 양규가 무로대無老代에서 거란 병사들을 습격하여 2,000여 급 머리를 베고 사로 잡혔던 남녀 3,000여명을 되찾아왔다. 계사일. 양규가 또 다시 이수梨樹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2,500여 급 머리를 베고 사로 잡혔던 남녀 1,000여명을 되찾아왔다. 병신일. 양규가 또 다시 여리참餘里站에서 전투를 벌여 1,000여 급 머리를 베고 사로 잡혔던 남녀 1,000여 인을 되찾아왔다. 이 날에 세 번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하였다. 임인일. 양규가 다시 애전艾田에서 거란 선봉대를 급습하여 1,000여 급 머리를 베었다. 얼마 후 거란 군주가 이끄는 대군이 갑자기 공격해오자 양규는 김숙흥과 더불어 종일토록 힘써 싸웠으나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졌기에 진영이 무너져 모두 전사하였다. 양규는 고립된 군대를 데리고 한 달 사이에 7번 전투를 치르는 동안 사살한 거란 병사들이 매우 많았고 사로 잡혔던 백성 30,000여 구를 되찾았으며, 획득한 낙타·말·병장기[器械]들은 이루 다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거란 병사들은 여러 장수들의 공격을 받은 데다 또 다시 큰 비를 만남으로써 말과 낙타가 지치고 갑옷과 병기들은 모두 산실되었다. 양규를 공부상서工部尙書로, 김숙흥을 장군將軍으로 추증하였다. 양규와 김숙흥에게 공신녹권을 하사하였다. 11월.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에 거란이 들어와 노략질하였을 때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양규와 부지휘 김숙흥(별장別將, 정7품 무신) 등은 선봉에 나아가 힘써 격투를 벌이며 연이은 전투에서 적을 돌파하였지만 화살이 고슴도치 털처럼 집중되어 모두 전장에서 전사하였다. 또한 대중상부 11년 거란 병사가 난입하였을 적에는 병부상서 지중추원사兵部尙書 知中樞院事 강민첨姜民瞻이 원수元帥가 되어 북을 치며 힘써 돌격하여 반령盤嶺 들판에서 크게 패배시켰으니, 거란군이 퇴각하면서 창과 갑옷을 내버려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강민첨은 이에 10,000명을 포로로 잡거나 참수하였다. 그 공을 추념한다면 포상을 시행하기에 합당할 것이다. 공신각功臣閣에 모습을 그려 이로써 후대를 권면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가을 8월. 제制하기를, “현종께서 남쪽으로 행차하셨던 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 박성걸朴成傑이 호종하여 공이 있었다. 삼한후벽상공신 양규 등의 녹권에 함께 기록하여 시행하라.”고 하였다. 양규의 공을 기록하고 증손 양제보楊齊寶에게 은합銀榼을 하사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