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시/ 서해성] 백년 동안의 죽음

1923년 9월 일본 간토대학살關東大虐殺로 죽은 23,059번째 조선인 목소리

▲ 서해성 작가
▲ 서해성 작가

끝끝내
쥬-고엔 고짓센 15円(엔) 50銭(전) 
따라서 하지 못했어요. 
쿠가쯔 후쯔까くがつ ふつか(9월2일)도 
말하지 못했어요. 
백년 동안 익히지 못했어요. 
내 혀는 그날로 굳어 있어요.

나는 센징鮮人.
쥬-고엔 고짓센 
말하지 못하는 
나는 조센징.

도쿄 한복판에서 
죽창이 내 가슴을 찌르고 들어와도 
식칼이 내 목을 찔러대도 
나는 발음할 수 없었어요. 
두려워서가 아니에요. 

쥬-고엔 고짓센, 
파피푸페포 ぱぴぷぺぽ, 또 가기구게고 がぎぐげご.
온전히 내뱉지 못한 채 
나는 죽어서 
쿠가쯔 후쯔까에 죽지 못하고 
9월2일에 죽었어요. 
또 9월6일에도 살해되었어요. 

불을 지르지도 
우물에 독을 타지도 않았는데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쥬-고엔 고짓센
아무리 채근해도 일본 사람처럼 발음하기 어려웠어요. 
더듬, 더듬거렸던 건 맞아요. 

센징이다! 
게다 소리는 골목을 몰려오고 
나라의 적! 
조센징은 모두 죽여라!
죽창 끝이 하나로 모이고 
긴 칼날이 내 목을 앞에서 잘라갔어요. 

지진이 나서 
센징을 곡괭이로 때려 죽여야 한대요. 
불이 났으므로 
조센징은 니뽄도에 죽어야 한대요. 
동네 우물에 물이 없어도 
대일본제국 총검에 찔려 죽어야만 하는 
나는 후테이센징 不逞鮮人(불령선인). 
파피푸페포 가기구게고
따라하지 못 하는 
나는 정녕 센징. 

살고 싶어서 무릎 꿇고
파피푸페포 파피푸페포 
가기구게고 가기구게고.
두 손 싹싹 빌면서 
쥬-고엔 고짓센
쥬-고엔 고짓센.
칼에 찔려서도 한 번 더 발음해보다가 
쿠가쯔 후쯔까에 피흘리면서 
나는 죽어요. 
2만 3천 쉰아홉 번째 센징으로 
나는 죽어요. 
백년 동안이나 죽고 있어요. 

오늘은 관동대지진 1백년 되는 날
쿠가쯔 후쯔까 9월2일.
쥬-고엔 고짓센 
다시 따라해봐도 따라할 수 없는 
나는 센징. 
저승에서조차 아무도 모르는 
몸뚱어리마저 불에 타버린 
나는 센징,
2만 3천 쉰아홉 번째 조센징.

나는 죽어서도 죽지 못한 채 
아직도 죽고 있어요. 
내지인들이 찌르는 죽창 타고 흐르는 내 피가 이렇게 따뜻해서 
나는 백년 동안 죽고 있어요. 

* 일본 관동關東대지진은 1923년 9월1일에 발생했고, 조선인을 집단학살한 간토대학살關東大虐殺은 2일~6일까지 닷새 동안 진행되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가려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쥬-고엔 고짓센(15円 50銭)’, 또는 ’파피푸페포 ぱぴぷぺぽ’’가기구게고がぎぐげご’를 일본인처럼 발음하지 못하면 찔러 죽이고 때려죽이고 베어 죽이고, 태워 없앴다. 조선인 집단학살 피해자는 23,058명이다.(1924년 3월 독일 외무부 문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는 단 두 명이 살해되었다고 말했다. 살해당한 생명을 숫자로 환산할 때 잔인성은 은닉되고 문서로 집계할 때 국가 범죄의 비인간성이 함께 증발한다. 사망한 조선인 숫자와 이름을 모두 아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9월2일은 일본에서 ‘구두의 날’이다. 구두의 일본어 발음 ‘쿠츠’가 9월’(쿠가쯔’)과 비슷한 데서 착안했다. 1백년 전 쿠가쯔 후쯔까, 곧 9월2일에 그들은 조선인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집단 기억을 지우는 방법 중 하나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이 구두의 날이 된 건 그저 우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시아의 여러 학살 현장이 이윽고 관광지로 탈바꿈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학살지가 신혼여행지가 되는 건 비극과 망각이 중첩되는 이중 비극이다. 

*도쿄도 스미다구 야히로(墨田区 八廣)에 관동대지진 한국·조선인 순직자 추모비 등 일본 몇몇 군데에 관동대지진 학살 관련 빗돌이 있지만 국내에는 이를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없다. 집단학살당한 그 ‘조선인’들은 넋마저 고국에 돌아올 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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