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연주 여행 바라보며 맞은 노 대통령 5주기
작은아들 지원이는 자기 형이 그랬던 것처럼 학교 오케스트라 단원입니다. 지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엔 둘이 함께 연주한 적도 있지요. 미국이란 나라에 저력이 있다면, 아마 이런 걸 겁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취미로 악기를 다루고, 그걸로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아무리 깡촌 시골 마을의 작은 학교라도 밴드나 오케스트라가 있고, 그 아이들이 보여주는 화음이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학교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아이들이겠지요. 지원이가 속한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인종도 여러 인종이 잘 섞여 있고, 부자도 있고 가난한 집의 아이들도 있고... 정말 샐러드 보울 안의 샐러드처럼 잘 섞여 있습니다.
적어도 그 아이들이 자기의 집안 사정 때문에 기 죽을 일은 없다는 것이 보기 좋습니다. 물론 악기를 구하는 것이나, 아이들 레슨을 따로 시키려면 돈이 들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한’것은 아닙니다. 악기는 대여를 하면 되고, 레슨은 형편 닿는 대로 시키면 되니까요. 아니면 학교 선생님이 재능 있는 아이들은 더 열성적으로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매년 5월, 지원이가 다니는 학교의 7학년 아이들은 워싱턴주의 산간지방 안에 있는 독일마을 레벤워스의 중심에 위치한 야외 연주 공간에서 연주회를 갖습니다. 말하자면 소풍을 겸해서 연주회를 가는 거지요. 올해는 마침 제 휴일과 작은 아이의 연주 일정이 맞게 되어 샤프론(chaperone, 인솔자, 보호자) 일행의 한 명이 되어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몇년 전 지호가 6학년 때 이 여행을 함께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시간이 안 맞아 아이들의 연주 여행을 함께 갈 수 없었지만, 이번에 시간이 맞게 돼 다녀오게 된 것입니다.
올해는 그게 하필이면 5월 23일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버스에 타고 있는 동안, 그리고 아이들의 연주를 듣는 동안에도, 사진을 찍어주는 동안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5주기, 아마 그가 꿈꿨던 세상도 이런 세상이었을 거라고. 적어도 아이들이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 취미를 고르는 데 있어서 제약을 받지 않는 그런 세상, 그리고 적어도 ‘비교적’으로라도, 공평한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세상. 마이너리티이기 때문에 핍박받을 일이 없는 세상.
우리는 노무현 시대가 얼마나 우리에게 큰 기적이고 선물이었는지를 다시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노무현을 만들어낸 것도 우리였고, 그를 버린 것도 우리였습니다. ‘노무현이라는 마이너리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그가 그 기득권층의 벽을 넘지 못하고 힘들어했을 때 우리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학대로 ‘군림’하려 들지 않았기에, 정치권력이란 늘 군림의 도구로만 써 왔던 친일부역세력과 그 후예들에겐 당연히 눈엣가시 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봉건적 사회구조의 틀은 깨졌으되 아직도 사람들의 생활 양식과 의식 속에 봉건 구조가 살아남아 있는 사회에서 노무현이란 이름을 지닌 기적은 너무 일찍 찾아왔던 것일까요. 아니면 일제시대의 청산이 제대로 안 된 상황에서, 친일의 청산을 중요한 시대적 사명으로 알았던 그의 언행이 두려웠던 것일까요.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그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손에 직접 피를 묻혔던 그렇지 않았던 간에.
이곳에서 어린 아이들의 오케스트라 연주 모습을 보면서 노무현이란 이름을 떠올리게 되는 건, 당연히 이곳 시간으로 오늘이 5월 23일이란 것 때문이기도 하고, 또 우리 사회가 ‘세월호 사건’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채 피어나지도 못한 어린 학생들이 낡고 봉건적인 잔재가 그대로 ‘적폐로 쌓여 있는’ 사회 곳곳의 문제가 누적된 것에 의해 미래를 부정당하는 이 거대한 시대의 부조리 속에서, 미국의 평범한 아이들의 삶을 보면서 마음에 맺혔던 것이 더 울컥했던게지요.
시애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