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도 5.18항쟁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전두환 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던 그 법이 바로 국가보안법입니다. ‘체제’의 안전이 아닌 ‘정권’의 유지·연장이 목적이었습니다. 독재권력에 저항하는 민주인사를 고문과 조작으로 가두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입니다.

민중가요를 불렀다고 유죄판결을 선고받았습니다. 남·북의 젊은 청춘들의 극적 이야기를 소재로 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북한 사회를 미화한다고, 지역 문화행사에서 북한 관련 시를 낭송한 것이 북 체제를 찬양했다고, 평화적 통일과 화해 정책을 추진하는 대통령이 간첩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수사기관에 고발장들이 접수되는 것도 국가보안법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러한 희극적 비극의 상황을 끝내야 합니다.”

▲ <이미지 출처=국회 청원 캡처>

지난 10일 국회 국민동의청원 사이트에 게시된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한 청원> 내용 중 일부다. 맞다. 2020년대 신한류의 주역이 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북한 미화’로 고발하는 행태가 벌어지는 법적 근거가 바로 국가보안법 맞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죽음의 문턱으로 밀어 넣은 것도, 더 멀리 제주4.3과 여순항쟁의 피해자들에게 옥고를 치르게 만든 것 모두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불법으로 제정한 국가보안법이란 악법 때문이었다.  

그 국가보안법 폐지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공식 회부됐다. 해당 국민동의청원에 열흘 만에 10만 명이 동의하면서다. 지난 20일 사회 각계 단체가 참여한 국가보안법폐지국민행동은 ‘국가보안법폐지 국민동의청원 10만 달성 보고대회’를 열고 “이제는 국회가 응답해야 한다”며 “사상 검열과 마녀사냥의 근거가 되는 반민주 반인권 악법을 폐기해,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적극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여정부 당시 4대 개혁입법 중 하나로 폐지 움직임이 일었으나 보수야당 및 보수 개신교 등 보수 진영의 반대로 무산됐던 국가보안법 폐지는 70년 넘는 악법의 사슬과 피해자의 양산 고리를 끊고 문재인 정부 내에 실현될 수 있을까. 

역시나 걸림돌은 보수진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20일 한국교회언론회가 발 빠르게도 “국가보안법 폐지는 시기상조”라\라는 내용의 논평을 냈다. 국민의힘 역시 일치감치 반대할 움직임이 엿보인다. 

20세기식 ‘이적행위’ 운운한 보수 

“국가보안법에 대한 논쟁은 수년간 있어왔으나, 아직까지 존재하는 것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상태이고, 지독한 공산주의와 대치하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다. 한반도에는 지난 70여년을 호시탐탐 남침하려는 북한이라는 ‘주적’(主敵)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현재 국방백서에서는 북한을 주적으로 표시하지 않고, 포괄적 개념으로 정리하고 있음). 

국가보안법 폐지를 청원하는 내용을 보면, 부정적인 것들만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이 법을 폐지하게 될 때, 과연 혼란은 없게 되겠는가?(...). 법률은 제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를 지키고 적용하는 사람들의 양식과 양심에도 영향이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법률을 폐기하면 국가 안전과 국민의 생존과 자유를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국가보안법은 적어도 한반도가 통일되기까지는 유지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언론회의 해당 논평 중 일부다. 서두에 언급한 국회청원 내용만 뺀다면 10년 전, 20년 전, 아니 30년 전 주장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대한민국의 주적은 북한이요, 국가보안법 폐지는 이적행위라는 20세기 보수의 논리 그대로다. 

한국교회언론회가 어떤 단체인가. 최성해 전 동양대 총장이 ‘현 목사’란 타이틀로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검찰의 ‘조국 일가족 강제 수사’가 개시됐던 2019년 8월 27일 <조국(曺國) 후보자님, 조국(祖國)을 위해서, 조국(早局)하시죠!>란 뜬금없는 논평을 통해 최 전 총장의 의심스런 행보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던 바로 그 단체 아닌가. 

▲ 한국교회언론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최성해 전 동양대 총장. <사진출처=한국교회언론회>

국민의힘 또한 오십보 백보였다. 21일 당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한 한기호 국방위원회 간사는 “(국가보안법 폐지 국회 청원의 10만 달성이)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는 행동이며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대한민국 정체성을 망가뜨리고 있다”며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국가보안법은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켜내는 마지막 보류라고 할 수 있다. 대법원도 2004년도 북한이 우리 체제를 전복시키고자 시도할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다는 견해를 바탕으로 국보법 폐지는 스스로 무장해지를 가져오는 조치라고 판단한 예가 있다. 평화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국가보안법의 폐지가 아니라 북한 정권의 절대적인 통제를 통한 인민의 인권유린을 멈추는 것이며 외부와의 완전한 단절을 해지하는 데 있다. 

핵무기를 앞세워서 대한민국을 정복하려는 적화 야욕을 포기시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의 불가역적 상황을 만들라는 지시 때문에 움직이는 듯한 이러한 일련의 정부, 정치인, 사회단체의 활동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우리당은 함께 노력하고 국민과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고 본다.”

말 그대로 시대의 역행이라 할 수 있다. 22일(한국시간)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해 한미 정상이 밀접한 소통 등을 공식화한 것과 비춰봐도 구시대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의힘도, 보수 개신교계도 여전히 20세기를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다. 특히 한국교회언론회의 논평 중 아래 내용은 국가보안법 폐지의 정당성을 스스로 자백하는 꼴이었다. 

‘최성해’ 한국교회언론회가 자백한 폐지의 정당성 

“국가보안법에 대하여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내용을 잘 모른다. 또한 국가보안법으로 인하여 생활에서 불편할 일도 없다. 그런데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혹시라도 이런 주장이 국가의 안위를 외면한 것이 되어 결과적으로 매국적, 혹은 이적적(利敵的) 행위라도 된다면,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과연 그럴까. 국가보안법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이들이 대부분 정치사범이나 학생들 혹은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참여정부에서 폐지하지 못한 국가보안법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보수정권이나 정권 유지 차원이나 보수정당의 마타도어에 활용됐을 뿐만 아니라 국정원과 같은 정보기관이나 공안검찰의 실적 유지에 힘을 보탰을 뿐이었다. 

반면 일반 국민들은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물론 법의 제정 배경이나 역사적인 폐해를 모르고 사는 것이 다반사다. ‘악법도 법이다’란 옛날 옛적 테제를 고수할 생각이 아니라면 한미정상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체제 구축에 합의한 오늘날 ‘국가보안법이 폐지는 이적행위’란 구시대적 발상을 유지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얘기다. 

지난 20일 강은미 정의당 의원은 국가보안법 폐지안을 대표발의했다. 정의당의 6명 현역 의원 전부와 함께 이용빈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홍걸 양정숙(이상 무소속),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공동발의했다. 

▲ 지난해 12월 1일 각계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이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정 72주년을 맞이한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촉구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뉴시스>

이에 앞서 더불어민주당 이규민 의원이 국가보안법 7조(고무·찬양죄)를 삭제하는 내용이 포함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발의, 법제사법위원회에 이미 상정돼 있고, 같은 당 민형배 의원 또한 국가보안법 폐지 특별법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당 오현주 대변인의 논평처럼, 21대 국회는 올해 2월에 여야 합의로 4·3 특별법 전부 개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전 정부에서는 상상도 못할 특별법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나름 무사통과된 혁신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국가보안법 폐지의 경우, 제주4.3과 그 유래를 같이하는 한편 법안 폐지에 대한 사회적 논쟁은 훨씬 더 오래됐고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 또한 수배 더 치렀다고 볼 수 있다. 국회국민청원을 통해 재차 폐지 분위기가 조성된 지금이야말로 범진보 180석의 효능감이 발휘될 때다. 바로 지금이, 올해가 적기다.  

하성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