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해성 소설가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가가거겨, 국가는 기억력이 없다]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에 부쳐

국가는 기억력이 없다
아버지는 치마길이를 쟀다
딸은 과다노출을 쟀다
권력은 기억력이 없다
기억력이 없을수록 힘이 세다
이상한 일이다
희망은 기억력이 없고
불행에는 수취인불명이 없다
확실히 불행은 기억력이 좋다
이상하지 않은가
국민을 기억하는 국가는 없다
죽은 뒤에도 나오는 세금고지서
또는 입영열차나 호송버스에 탄
몇몇 국민이 국가를 기억할 뿐이다
싱싱한 망각은 권력의 탈의실이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그뿐
갑자기 궁금하다
국가의 치마길이는 누가 재는가
치마는 기억력이 없다

국가는 치마보다 기억력이 짧다
아버지는 총으로 헌법 전문을 쏘았다
아들은 대검으로 헌법 제1조를 찔렀다
쿠데타는 기억력이 없다
책에는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고 씌어 있다
이상한 일이다
총알이 조국을 근대화시켰다는 말도 있다
그날 노동자들은 정시에 공장 정문을 통과했다
농부는 들에 나가 씨를 뿌렸다, 해뜨기 전에
학생들은 정시 전에 배가 고파왔다, 그것이 정시였으므로
국가는 기억력이 없다
권력은 헌법을 잊을수록 힘이 세다
망각은 기억력보다 힘이 세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누가 국가에게 치마를 사줄 것인가
치마는 국가보다 기억력이 좋다
가가거겨
누가 국가에게 글자를 가르칠 것인가
누가 권력에게 기억력을 가르칠 것인가
국가는 기억력이 없다
가가거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