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해성 소설가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표절에 대하여]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는 방금 전 자신을 표절한다.
나루터 강물은 작년에 흘린 눈물을 표절한다.
하루는 어제를 표절한다. 표절한 이름이 오늘이다.
산은 골짜기를 표절한다.
때로 아동의 크레용 그림을 흉내낸다.
대지 위의 저녁 밥은 땀을 표절한다.
작약꽃은 반닫이 문짝 무늬를 표절한다.
구름은 하물며 허영을 표절한다.
사막 능선은 젊은 여인들의 몸을 허무하도록 뜨겁게 표절한다.
알다시피 그리움은 연애를 배신으로 표절하고도 뻔뻔하게 가슴에 서리어 산다.
구멍난 함석지붕에 황급히 떨어지는 소나기는 망각을 표절한다.
시는 이 모든 걸 표절한다.

부연하건대
혁명은 피를 표절해서 더웁고
군국주의는 할복자살한 배를 표절해서 운명이 짧다.
파시즘은 나뭇다발로 감싼 도끼라는 뜻인 파스케스에서 도끼날만을 표절한다.
새가 날아서가 아니라 비상이 자유를 표절했기 때문에 하늘은 아직 푸를 수 있다. 그대가 멀리 내다봐서 유리창이 맑은 것과 이치가 같다. 그렇다. 유리창은 소녀를 표절한다.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는 신은 인간을 표절한다.
모든 가난한 기도가 밀레를 표절하듯
금강산은 겸재를 훔쳐 옛대로 한결 의연할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밤에는 누구나 다 자기 자신을 훔칠 따름이다.
어둠은 스스로를 표절하여 더 어둡고
다만 비겁은 용기를 표절할 용기가 없다.
죽음은 흔히 삶을 훔치지만 밤이 낮을 표절할 수는 없다.
절도는 스스로를 훔치는 일을 빼고는 모든 걸 훔친다. 지상의 마지막 도둑질은 도둑이 도둑질을 훔치는 일이다.
훔친 촛불로 책을 읽을 수는 있지만
영혼의 재산을 훔치면
잘라내버린 손톱을 먹고 쥐가 사람 행세를 하게 된다.
그 쥐가 문자 사이에서 너를 갉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