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해성 소설가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무명비 앞에서]

묘비명이 없다고
사연이 없겠는가
무덤이 낮다고
의로움이 높지 않겠는가
어제 죽었다고
내일을 꿈꾸지 않았겠는가
이곳도 바람 불고
꽃 피는데
빗밤에 호곡소리 돌 틈을 후비지 않겠는가
대지에 누워 능선을 이루었거늘
어찌 파도의 노래 모르겠는가
바위에 새기지 않았다고
굳은 맹세가 없겠는가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또 봄이 여기 와서 무릎을 꿇나니
오직 정의에만 한없이 복종하여
허리 굽혀 산은 낮고
나무들 고개 숙이니
하물며 묘지가 없다고
넋을 잊겠는가
비바람 눈보라 바람소리
너를 부르니
이름이 없어 더 간절한
뜨거운 묘비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