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4.3항쟁은 우리 모두의 역사, 당연히 꼭 알아야”
최근 세간의 주목을 받고있는 한국영화 한 편이 있다.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라는 뜻 모를 제목의 이 영화는 잘 나가는 ‘충무로 감독’이 만들지도, 거대 제작비가 투입되지도 않았다. 그 흔한 ‘스타배우’의 이름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 정식 개봉되지도 않은 작품이다.
‘겉모습’만 보면 흥행과는 사뭇 멀어 보이지만 ‘지슬’에 쏟아지는 관심은 대단하다. 평단의 호평이 쏟아지고 있고 정식 개봉을 기다리는 영화팬들의 기대감을 인터넷 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급기야 세계 최고의 독립영화제라는 ‘선댄스’는 ‘지슬’에게 심사위원 대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줬다. 한국영화가 이 상을 받은 것은 최초의 일이다.
그러나 이같은 성과만으로 ‘지슬’을 논하기는 어렵다. 특별한 의미를 가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지슬’은 제주 4.3 항쟁을 소재로 한 최초의 극영화다.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하에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희생된 ‘슬픈 우리 역사’다.
60여 년간 ‘육지 사람들’의 기억 저 편에만 머물러 있던 ‘4.3’은 이렇게 오 감독의 영화를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go발뉴스’는 최근 ‘지슬’의 배급사 사무실에서 오 감독을 어렵게 만나 ‘지슬’과 ‘4.3’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그는 ‘달변’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분명한 어조로, 때로는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인물이었다.
“‘4.3’이 묻힌 이유는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육기관에서 ‘4.3’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저 역시 그러한 환경에서 공부했고 지역주민들이나 가족들로부터 ‘4.3’에 대해 전해들은 바가 거의 없었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4.3’에 대해 좀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을 때야 전해듣게 됐습니다. 지역주민들은 지금까지도 이야기하기 힘들어하는, 워낙 힘들고 아픈 역사이기 때문에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많이 고민 했습니다”
오 감독은 ‘4.3’이 제주만의 역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4.3’이) 이렇게 묻혀버린 역사가 된 이유중 하나는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주의 역사로만 의식하거나 개인사 문제로 작게 생각하는데 한국사에서 기필고 다뤄져야 하는 부분입니다. 크게는 미 군정과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세계사적 시선에서(도) 이 사건을 돌아봐야 하는 부분이 있지않나 생각합니다.”
‘지슬’ 뿐만 아니라 노근리 사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 등 과거사 관련 영화들이 나오는 것에 대해 오 감독은 “무척 중요하다”고 입을 열었다.
“영화라는 장르는 다른 장르에 비해 발언의 기회가 좋습니다. 발언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기 때문에 (이를) 예술가들이 올바른 정신으로 써 준다면 사회에 또 다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조금만 더 건강하게 (발언)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지슬’은 제주도 사투리로 ‘감자’를 의미한다. 영화 속에서 난리를 피해 동굴로 숨어든 제주민들은 ‘지슬’을 나눠먹으며 소소한 일상사를 이야기한다. ‘지슬’은 이들의 피난살이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먹거리이기도 하다. 오 감독은 감자가 가진 보편적 정서를 이야기했다.
“감자는 시대를 연명해주는 아주 중요한 음식이었습니다. 시대정신이 존재하는 음식을 우리는 ‘소울푸드’(soulfood)라고 하죠. 감자는 전 세계의 ‘소울 푸드’가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제주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지슬’이라는) 단어는 사투리지만 ‘음식’의 역할을 보면 전 세계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품고 있잖아요. 그래서 (영화제목을) ‘지슬’이라고 지었습니다.”
“제사 지낼 때 빨간 옷 입고 갈 수는 없지 않나”
‘지슬’을 감상한 이들은 뛰어난 영상미를 극찬한다. 최근 국회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본 김제남 진보정의당 의원은 “굉장히 아름다운 영상미로 다뤘다”며 “슬픔을 미적으로 표현했다”고 극찬했다. 관객에게 다소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임에도 이런 평가를 받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에 대해 오 감독은 “제가 아름답게 찍은 게 아니”라며 “이미 제주도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저는 ‘어떻게 찍을까’ 앵글을 신경 쓴 정도”라고 말했다. ‘지슬’을 흑백영화로 만든 것에 대해서는 “제사지낼 때 빨간 옷을 입고 갈 수는 없지 않나”라고 이야기했다. 고향사랑이 듬뿍 묻어나는 ‘우문현답’이었다.
“저는 솔직히 서울에 관심이 없습니다. 청와대가 어디있는지도 모르고 광화문에 어떻게 가야하는지도 몰라요. 제가 살고 있는 동네를 안다는 것이 너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서울에 살고있다면 서울의 이야기를 담는게 중요하겠지만 서울의 많은 감독들이 그 일을 해야하는 것이죠.”
‘제주사투리’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도 그의 생각은 단호하고 분명했다. ‘지슬’은 거의 모든 대사가 제주도 사투리로 구성돼 있다. 그 어느 지방보다 어렵기로 소문난 ‘제주사투리’인 만큼 이 영화에는 타지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막이 들어가 있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제 첫 번째 관객은 제주도 관객들입니다. 더 넓은 공간에 있는 이들이 두 번째(관객)입니다. 서울 중심으로 보면 우리가 (쓰는 말이) 사투리지만 우리한테는 사투리가 표준어에요. (‘지슬’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상영될 때 그 분들은 사투리를 신경쓰지 않아요. 우리가 영어로 나온 영화를 자막으로 보면서 불평하지 않잖아요. 언어라는 것은 이야기를 전달받는데 조금 도움이 되는 거지 (영화감상을) 제한(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쯤되면 오 감독이 가진 ‘제주도민’으로의 자부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 하다. 그의 말마따나 ‘지슬’은 다음달 21일 정식으로 개봉되지만 제주에서는 조금 더 빠른 다음달 1일부터 관객들을 찾아간다.
오 감독은 ‘제주도 이야기’가 충분히 글로벌한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거나 공유하지 못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세계관이 좁아보일 수 있지만 제주도가 갖고 있는 깊이는 무척 무한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창조신화가 있는 곳이 제주도에요. 그건 어마어마한 자산입니다.”
마지막으로 “관객들이 ‘지슬’을 꼭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오 감독은 ‘우리’라는 표현을 썼다. 그의 대답에서 깊은 진심이 느껴졌다.
“(‘4.3’은) ‘당신의 역사’이고 ‘나의 역사’이고 ‘우리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모르고 있어요. 우리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 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누가 어떤 짓을 했는지 대한민국이 한 나라라면 우리의 가족사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의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