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개혁과 국민 만들기.. 땅부자 김성수도 동의한 농지개혁
| [편집자주] 국민을 위한 법이 잠자고 국민들이 스스로 법을 찾아 거리로 내몰리고 있는 2014년의 대한민국. 66주년 제헌절을 맞아 역사학자 한홍구 박사가 다시금 ‘제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글을 ‘go발뉴스’에 보내왔다. ‘진보’를 말하면 ‘종북’이 되고 ‘민주주의’를 외치면 ‘빨갱이’로 몰리는 현실 속에 한홍구 박사의 이 글이 독자들에게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길 바란다. 더불어 귀한 글을 주신 한홍구 박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농지개혁과 국민 만들기
제헌헌법 86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라고 되어있다. 이는 지주의 토지를 비록 유상이지만 강제로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한다는 내용이다. 당시까지 토지가 가장 중요한 부의 원천이었던 상황에서 농지개혁은 수백 년 간 지배층으로 군림해 온 지주층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현대사 연구가 처음 시작된 1980년대에는 이북에서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실시된 토지개혁과 비교하여 농지만을 대상으로 한 남쪽의 농지개혁이 제한된 의미만을 갖는다고 저평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러나 계급으로서의 지주가 완전히 소멸했다. 또 농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들의 ‘자발적 중노동’과 엄청난 교육열은 장기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주대환) 더구나 한국전쟁의 향배와 관련하여 본다면 농지개혁의 의미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평가되어 마땅하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북쪽이 일찍이 1946년 3월에 토지개혁을 단행한 것은 남쪽의 우익세력에게 커다란 압박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들을 보면 날 때부터 대한민국 국민이었던 사람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국민학교’를 나왔고, 매주 애국조회를 했고, TV가 시작할 때도 끝날 때도 애국가를 들었고,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쳐온 사람들이었다. 반면 1948년 당시 38도선 이남의 주민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거의 갖지 못했다. 국민들의 절대 다수는 조선이나 대한제국 시절에 태어났거나,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당시는TV방송은 없었고 라디오의 보급도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학교 문턱을 밟아보지 못한 문맹이 80퍼센트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신생, 그리고 분단 정부로서의 대한민국 정부에게 농지개혁은 ‘국민만들기’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북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남쪽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보수 우익인사들은 공산혁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당시 대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급진적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예로 제헌의원 정해준은 1948년 7월 3일 열린 헌법안 제2독회에서 헌법에 근로자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명문화하지 않는다면 38도선 이남에서 ‘반동자와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혹은 “좋지 못한 일에 가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땅부자 김성수도 동의한 농지개혁
땅을 밭갈이하는 농민들에게 나눠주겠다는 것은 독립운동가들이 농민들에게 했던 오랜 약속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단체들은 토지혁명이나 토지 국유화나 같은 급진적인 토지제도의 개편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이것은 농민이 전체 인구의 80퍼센트에 육박하는 가운데 독립운동을 해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민족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점하는 농민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독립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어디 경치 좋은 곳에 소풍가는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걸어야 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다. 만약 농민들에게 독립 후 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농민들이 독립운동에 광범위하고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농민들의 참여는 소작료를 조금 낮춰주는 정도로는 끌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인 지주의 땅뿐만 아니라 조선인 지주의 땅까지 나눠준다는 약속은 불가피했다.
제헌헌법의 농지개혁 조항은 지주의 사적 토지소유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주세력의 결집체인 한국민주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인촌 김성수는 그 자신이 당시 조선 팔도에서 첫 손에 꼽히는 땅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보성전문 시절부터 교주와 교수로 김성수와 깊은 인연을 가진 유진오는 헌법조항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김성수를 만나 “농지개혁만이 공산당을 막는 최량의 길”이라고 설득했고, 김성수는 유진오의 말에 “그것도 그렇겠다”라며 결국 농지개혁에 찬성했다. (<헌법기초회고록>: 30) 알토란같은 농지를 다 내주어야 한다니 김성수 입장에서 무척이나 속이 쓰렸겠지만, 그는 오늘날의 자칭 ‘애국보수’와는 격이 다른 큰 인물이었다.
<동아일보>의 김성수나 <조선일보>의 방응모가 친일을 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해방 후 어느 독립투사도 일제가 폐간시켜버린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친일을 했다고 복간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보험료’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겠지만, 만해 한용운 같은 많은 독립지사들이 풍족하지는 않아도 끼니를 때울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덕분이었던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사주 일가들이 김성수나 방응모가 보여주었던 아량과 금도를 반의 반만 보여줬어도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그렇게 지탄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자칭 ‘애국보수’들은 정말 자기 조상의 역사부터 다시 공부해야한다. 한국 보수의 원류는 김창룡이나 노덕술 같은 인간 백정 일제 앞잡이들이 아니다. 정말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던질 줄 알았던 우당 이회영 등 6형제, 인촌 김성수, 계초 방응모 같은 분들이 보여준 모범을 재해석하는 작업은 보수의 재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자본주의를 폐기한 제헌헌법
헌법을 처음 만들 당시 한국에는 이렇다 할 헌법 전문가가 없었다. 당시 보성전문학교 공법학 교수였던 유진오는 “한국에 있어서 유일한 공법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진오는 미군정의 조선인 기구인 남조선과도정부의 법전편찬위원회, 한국민주당, 이승만의 영향 하에 있던 행정연구회 등 “5ㆍ10선거를 추진하던 3대 세력 전부로부터 단일헌법초안 작성을 부탁”받게 되었다. (<헌법주체회고록>: 10~31) 제헌국회는 유진오로부터 제안 설명을 듣고 그가 작성한 헌법초안을 토대로 한 조항 한 조항 축조 심의해가며 제헌헌법을 완성했기에 유진오가 쓴 <헌법해의>는 제헌헌법에 관한 독보적인 권위를 갖는 해설서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정부의 초대 법제처장이기도 했던 유진오는 법제처장 재임 중 발간한 <헌법해의> 초판에서 제헌헌법의 경제조항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경제문제에 있어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했다고 설명했다. 이 놀라운 표현은 수정판인 1952년의 <신고 헌법해의>에 가서는 “개인주의적 자본주의국가 체제에 편향함을 회피하고 사회주의적 균등 경제의 원리를 아울러 채택”한 것으로 완화되기는 했지만, 제헌헌법에 따른 대한민국의 초기 경제질서가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를 따른 것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현재 한국의 ‘애국보수’들에게는 참으로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제헌헌법이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깜짝 놀랄 정도로 급진적인 색깔을 띨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를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이행기의 특수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막대한 적산은 우익으로 하여금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물질적 양보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일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이익분배균점권을 강력히 주장한 문시환이 “해방 후에 우리가 경제 상태는 노자와 협조될 수 있는 큰 중요한 원인”으로 적산을 꼽았다. 이는 단독정부 수립 전후 정치엘리트들이 정치적으로 격렬했던 계급투쟁을 경제에 대한 국가기구의 계획과 통제를 통해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불행하게도 제헌헌법이 갖고 있었던 진보적인 조항도 현실에서 구체화되지 못했으며, 제헌헌법을 만든 의원들이 공유하고 있던 낙관적인 예상도 실현되지 못했다. 바이마르 헌법이 추구한 사회국가의 영향을 받은 유진오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대한민국 경제질서의 기본으로 규정했으나, 신용옥이 지적한 것처럼 “‘사회정의’로 표현된 사회국가의 이념을 뒷받침할 주요 기제들이 삭제되어 허구화”되었다. (신용옥: 37) 유진오는 1949년 6월 23일 헌법안 제1독회에서 제헌헌법안에 대한 제안설명에서 “이 헌법의 기본정신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와의 조화를 꾀하려고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경제민주화’는 사실 60여 년 전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를 출범시킬 때 그 구성원들과 맺었던 지켜지지 않은 오래된 약속이었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말하면 종북인가?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사건이나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에서 큰 쟁점이 된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 문제였다. 정부 측 견해에 따르면 김일성이 1945년 10월 3일 평양로동정치학교 연설에서 처음 진보적 민주주의란 말을 썼고, 통합진보당은 이를 추종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두 가지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진보적 민주주의란 김일성만이 독점적, 독창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과연 김일성이 1945년 10월 3일 평양로동정치학교에서 했다는 연설의 텍스트를 역사연구를 넘어 사법적 판단의 증거로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김일성이 해방 후 처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평양시 민중대회에서였다. 이날 행한 김일성의 연설은 전문이 남아있지 않아 1949년판 <조선중앙연감>에 처음 실릴 때 200자 원고지 두 장 분량 정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수만 명이 들은 공개연설도 제대로 기록이 되지 않았는데 이보다 앞서 김일성이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평양로동정치학교에서 했다는 연설이 제대로 기록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평양로동정치학교에서 했다는 연설은 1980년에 나온 백과사전에 갑자기 등장한 뒤, 1990년대 간행된 <김일성 전집> 등에 ‘전문’이 실렸다. 형사 사건의 자백에도 ‘자백성립의 진정성’을 따져야하고, 재판의 증거법칙에도 독수독과론이 있고, 자연과학의 실험실에서 오염된 시료는 절대로 쓸 수 없는 것이다. 이북정권은 남아있지도 않은 김일성의 연설문을 수십 년 후에 ‘원문 그대로’ 복원하는 특별한 재주를 가졌는데 불행하게도 대한민국 정부가 이를 그대로 믿고 김일성이 연설을 했고 통합진보당 강령이 이 연설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에 필자가 심사하는 석ㆍ박사학위 논문에서 이 연설문을 중요한 역사자료로 활용하여 논지를 전개했다면 나는 절대로 그 논문을 통과시켜주지 않았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