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1일, 아직 완전한 독립 이루지 못했나”
보수라기보다는 극우와 수구에 가까운 일본과 한국의 역사왜곡 세력에 대한 고찰
오늘은 제95주년 3·1절이다. 하나의 의미 있는 역사로서 경건하게 기념행사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요즘 한국과 일본은 그렇게 속 편한 상황이 아니다. 한일 국민 간의 갈등이 여기저기서 노골적으로 표출되는 것은 물론이고, 공식적으로도 양국의 긴장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일관계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소위 말하는 보수 세력이 서로 이상하리만치 닮아 있다는 점이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3·1절을 맞아, 도대체 왜 이런 모습이 연출되는지에 대해 좀 살펴보려 한다.
일본의 ‘고노 담화’ 검증팀 구성 공식 발표
3·1절 하루 전인 바로 어제, 일본의 스가 관방장관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정부 안에 검토팀을 구성해 ‘고노 담화’를 확실히 검토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것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연행에 일본군 관여를 인정’한 지난 1993년의 고노 담화에 대해 정부 차원의 검증팀을 구성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셈이다. 이제 단순히 아베 총리가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일부 정치인이 과거사를 부정하는 망언을 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아예 대놓고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지우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위안부의 비극에 대해 구구절절 서술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쨌든 이것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보편적 인권의 문제다. 미국에서 위안부 소녀상과 위안부법이 만들어지고 프랑스의 국제만화축제에서 위안부 전시회가 성황을 이루는 건, 그저 한두 사람이 원해서 된 게 아니다.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든 인간이라면 누가 보더라도 잘못된 일이고, 역사의 교훈을 위해 모두가 알아야만 하기 때문에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문제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이걸 부정하려 하고, 급기야 국제사회도 이런 일본에 강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현재 일본 사회의 치명적인 문제 하나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인류의 보편적 인권 문제를 외면하고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며 심지어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보수'가 아니라 '극우'라고 불러야 한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들을 그저 보수파라고 부른다. 전범 국가인 일본이 극우주의자들의 준동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 그리고 언론과 교육이 이들을 보수라고 칭하며 역사왜곡에 동참하는 것, 그러면서 자신들의 과거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발생한다.
3·1절에 역사왜곡 교과서 판매하는 한국의 보수단체들
어제 이 뉴스를 본 사람들도 많을 텐데, 3월1일 오전 11시30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교과서살리기운동본부와 자유통일포럼은 ‘바른역사 독립을 위한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처음으로 현장 판매한다고 한다. 이 행사에서는 박성현 뉴데일리 주필 · 조전혁 명지대 교수 ·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 · 황장수 미래경영연구소장 등 보수 논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바른역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세계시장과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생명 번영의 길이라는 진실을 목숨을 걸고 증명해 낸 자랑스런 역사”라며 “치욕스런 친북 자학사관을 떨치고 우리 역사의 독립을 선언한다”고 주장할 예정이란다.
여기서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수준 이하’ 역사 왜곡을 또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텐데, 다만 우리는 ‘보수’와 ‘수구’를 좀 구별할 필요는 있지 않나 싶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친일 청산에 실패한 한국에서, 친일 세력의 기득권 유지를 대변하는 단체를 어떻게 ‘보수’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 만약 이들을 ‘수구’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도 ‘극우’를 ‘보수’라고 부르는 일본 사회와 전혀 다를 게 없는 셈이다.
[교학사 교과서는 사실 오류나 왜곡·과장·축소·누락·편파 해석·용어 혼동 등 중요한 잘못만 298군데에 이르고, 시대별로 전체 6개 단원 가운데 특히 일제강점기를 다룬 근대사 부분의 오류가 40%를 넘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일본의 극우와 한국의 수구를 보면서, 특히 주목해야 될 부분이 하나 있다. 그건 둘 다 양심적인 역사 인식에 대해서 ‘자학사관’이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일본의 극우 세력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사죄를 표명한 '고노 담화'와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고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를 자학사관이라고 비난하고, 한국의 수구 세력은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과 관련된 한반도의 비극을 그대로 서술하는 걸 자학사관이라고 비난한다. 극우파가 장악한 일본 정부가 이번에 ‘고노 담화 검증팀’을 구성하는 것도 이를 자학사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수구 정권이 들어선 한국에서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나오고 3·1절에 현장판매를 시도하는 것도 역시 자학사관을 없애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도대체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자학사관’이란 게 무엇인가? 과거의 시련을 인정하고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을 어떻게 자학사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고 잘못을 정당화하는 게 더 심각한 자학 아닌가? 다들 알다시피 전세계인의 공감을 얻고 국제사회가 높이 평가하는 건, 한국의 수구와 일본의 극우가 자학사관이라고 비난하는 바로 그 역사관이다.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로 인해 일본은 진정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의 과거 청산 사례에서 보듯이 비극적 역사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잘못에 대한 철저한 규명은 인류의 보편적 정서다. 이런 ‘상식’을 부정하는 일본의 극우 세력과 한국의 수구 세력은, 역사왜곡 세력으로서 당연히 지탄받아 마땅하다.
한국의 수구와 일본 극우가 유사한 이유
현재 일본의 총리이자 ‘우경화’의 상징적인 인물인 아베 신조는 일본 세습정치의 대표주자로서, 그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의 56·57대 총리(1957~1960)를 지낸 인물인 동시에 일본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만주에 세운 괴뢰국가인 ‘만주국(1931~1945)’의 총무청 차장을 지낸 ‘A급 전범’이다. 만주국은 겉으로는 중국인을 국가 지도자로 내세웠지만, 어차피 괴뢰국가였으므로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건 5명의 일본인 실력자들이었다. 기시 노부스케는 바로 이 5인의 실력자 중 한 명이었으며, 나중에는 귀국해서 일본 총리까지 역임했다.
아베 총리가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이유라고도 볼 수 있는 기시 노부스케는 1955년에 자유민주당(자민당) 결성에도 관여했는데, 2012년 12월 16일에 세습 정치가 만연한 일본은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인 자민당 소속 아베 신조가 또 다시 정권을 잡은 것이다(아베는 2006년에도 일본의 최연소 제90대 총리였다). A급 전범인 외조부가 있어서인지 집안 내력에 따라 아베 신조는 흔히 말하는 ‘극우파’ 정치인으로 활약했고, 그가 최고 권력자인 지금 일본은 전세계가 우려할 정도로 극우 세력의 준동이 무척 심각한 상황이다.
그런데 기시 노부스케가 다스린 '‘만주국’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다. ‘다카키 마사오’이자 ‘박정희’.. 친일과 독재의 아이콘, 박정희는 바로 만주국 군인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출세를 위해서 일본군 장교가 되었고, 광복 직후에 좌익세력이 맹위를 떨치자 요즘 말하는 종북 빨갱이인 남로당 프락치가 되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냉전시대를 맞아 미국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다른 반공주의자로 변모했던 박정희. 그는 언제나 권력의 이동에 민감했고, 자신의 성공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세상에 없는 철저한 출세지향 기회주의자였다.
박정희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만주국의 장교로 복무했으며(‘한목숨 다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 박정희가 일본 만주군에 지원하면서 쓴 혈서의 내용), 나중에는 어처구니 없게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그리고 2012년 12월 19일,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제18대 대통령이 된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아베 신조와 박근혜.. 만약 일본 국민들이 아베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또 한국 사람들이 박근혜를 뽑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 무거운 질문을 앞에 둔 채,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을 하나 상기해 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1961년 11월 11일,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일본을 방문한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듬해에 만주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만주국 황제로부터 금시계를 하사받았던 다카키 마사오는, 도쿄 내 수상관저에서 벌어진 만찬회에서 만주국의 최고 실세였던 기시 노부스케와 마침내 대면한다. 그리고 이튿날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를 위해 오찬회까지 마련했고, 다카키 마사오는 만주군관학교 시절의 교장을 비롯한 만주국의 지배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고 전해진다.
“경험도 없는 우리한테는 그저 맨주먹으로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욕만 왕성합니다. 마치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청년 지사와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품고 그 분들을 모범으로 삼아 우리나라를 빈곤으로부터 탈출시키고,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 출처: 강상중, 현무암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현재 일본의 극우와 한국의 수구가 유사한 이유는 절대 단순하지도 않고, 단 몇 년 사이에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다. 일제식민지와 만주국, 친일 청산 실패와 군사 독재,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한일협정과 세습정치 그리고 아베 신조와 박근혜.. 오늘은 제95주년 3·1절이지만, 지금 우리 앞에는 50년도 더 된 치욕적인 역사적 질문이 그대로 남아 있다. 1961년과 2012년,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는 만났고 아베 신조와 박근혜는 일본과 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가 반복되게 만든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한국의 수구와 일본의 극우만으로 이런 현실이 가능했을까? 2014년 3월 1일, 우리는 아직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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