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해성 작가

소싯적 여름철 소낙비를 그냥 맞으면 머리카락이 빠진다고들 했다. 코흘리개 깨복쟁이들은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세상에서는 그걸 ‘원자병’에 걸린다고 했다. 원자탄이 터진 근방에 살던 사람들이 겪게 되는 병이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오사카 등지에 살던 사람들은 귀국하고 시간이 상당히 흘렀지만 빗속을 함부로 쏘다니는 아이들을 말렸다. 핵물질 순환이 일으키는 현상에 비롯된 이유 있는 공포였다. 

핵폭탄이 투하되었던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는 처녀 임신과 낙태가 유행했다는 말도 돌았다. 잔류 방사능, 낙진 따위에 오염된 여성이 부러 임신을 한 뒤 6개월 남짓 지나서 아기를 지웠다는 것이다. 핵물질이 영양을 집중 공급 받아야 하는 아기에게 몰려서 독성이 몸 밖으로 빠져나간다고 여겼던 까닭이다. 공포가 어떤 일을 일으키는지 잘 보여주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신이 나던 해 민방공 훈련이 시작되었다. 민방위로 이름이 바뀐 건 석삼년 뒤였다. 매달 보름날 낮 오포(사이렌)가 울리면 학생들은 책상 밑에 기어 들어가거나 학교 담벼락 밑에 쭈그리고 앉아 ‘화생방’이라는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비닐 종이를 뒤집어 써야 했다. 화생방이란 화학, 생물학, 방사능전을 줄인 말인데 비닐 한 장은 이 공격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개인용 장비였다. 비닐이 핵을 막아줄 리 만무했지만 이는 정부 지시에 따른 국가 차원의 행동이었다. 

민방공 훈련용 비닐은 교문 앞 문방구에서 따로 팔았다. 그걸 준비해 오지 못하는 학생은 애국심이 부족한 아이였다. 그 시절에 애국심, 단체심이 결여되었다는 말은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말보다 더 잔인한 평가였다. 육성회비조차 못 내는 아이들이 수두룩한 처지에 가난한 아이들은 학교에서 비국민으로 추락 당하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일제가 뿌리고 간 식민지 문화는 오래도록 남아 이렇게 교육 현장에서 집요하게 학생들을 괴롭혔다. 

민방공 훈련 앞뒤로 담임교사는 어린이들에게 ‘원자병’ 양태를 소름끼치도록 전달해주었다. 머리가 둘 달린 아이, 뇌가 없는 아이, 팔이 넷인 아이가 태어났다는 따위였다. 기형 물고기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요컨대 원자폭탄은 한 번 떨어지지만 두고두고 병을 일으키는 원자병이 더 무섭다고 거듭 일깨워주는 내용이었다. 

한국인은 일본인에 이어 두 번째로 핵폭탄 피해를 많이 입은 집단이다. 핵폭탄 피해자만 해도 10만여명을 헤아리는데 5만여명이 사망했고 나머지가 생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살아 남은 이 중 4만 3천여명이 귀국하고 7천여명이 일본에 잔류했다고 한다. 이들은 오래도록 국가 관심 밖으로 버림 받은 채 사회적으로 제2차 피폭을 당해야 했다. 일본인 사망자는 21만여명에 이른다.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대량 피란이 발생한 이유 중 하나는 미군 핵폭탄 투하설이었다. 적어도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는 한국인에게 ‘원자병’, 곧 핵물질 오염 공포는 근거없는 게 아니다. 이는 그저 상상이나 괴담일 수 없다. 지금도 합천에서만 몇 백명이 ‘원자병’을 앓고 있다. 

어떤 이들은 후쿠시마 핵오염수 위험을 말하는 걸 괴담이라고 을러댄다. 괴담이라면 괴이하거나 무서운 이야기를 말하는 걸 게다. 그렇다면 그 말이 맞다. 이보다 괴이하고 무서운 이야기가 또 있겠는가. 괴이한 사태를 괴이하게 보지 않고자 하는 세력이 괴담을 더욱 넙고 깊게 배양시키는 장본인들이다. 괴담은 그저 탄생되지 않는다. 어떤 사태의 진실을 다 알지 못한 대중이 집단으로 공포를 느낄 때 이를 해명하고자 괴이한 이야기는 등장한다. 

일본이 핵물질을 방류하고 한국 정부가 들러리를 서고 있는 이 사태는 다시 한번 ‘원자병’을 방임하고 유포하는 죄악이 될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있다. 후쿠시마 사태는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국경이 없다. 후쿠시마의 오염 영역은 히로시마보다 더 넓다. 이를 막고자 하는 일은 생명체 본연의 반응이자 발로다. 이는 이념에 따른 행동 따위와는 근본을 달리 한다. 후쿠시마가 두 번째 히로시마, 나가사키가 되는 일을 저지코자 함께 하는 행동은 인간 무리를 넘어 모든 생명체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도리다. 오늘은 물론이거니와 다음 세대에게 ‘원자병’을 넘겨주지 않고자 한다면 지금이 그 마지막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