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태의 와이드뷰] 삼성과 정부가 외면했던 11년의 투쟁
“작업현장에서 화학약품에 의해서 병들고 죽어간 노동자를 10년이 넘도록 긴 시간 동안 해결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섭섭한 일입니다.”
끝내 황상기씨는 눈물을 훔쳤다. 13년 전 백혈병이 걸린 딸 유미씨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과 삼성전자는 24일 ‘삼성전자-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조정위 3자간 제2차 조정재개 및 중재방식 합의서명식’에서 사과·보상 관련 중재안에 서명했다. 무려 11년 간의 분쟁과 갈등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이 자리에서 황상기씨는 “유미가 걸린 병은 개인적으로 걸린 게 아니라 반도체 공장에 의해 걸린 것”이라며 “(딸이) 병에 걸린 이유를 꼭 밝혀내겠다고 유미와 약속했었다”는 소감을 전했다.
황상기씨는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2007년 3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다. 황상기씨는 이날 발표한 입장문에서 그간 함께 싸워준 많은 이들에게 감사를 돌리는 한편 아래와 같은 ‘섭섭함’을 드러냈다. 사실이며 또 진실일 수밖에 없는 ‘팩트’들이었다.
“그런데 칭찬할 수 없고 미운 곳이 있습니다. 바로 삼성입니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많이 병들고 죽는데도 끝까지 책임회피하면서 10년이 넘도록 있다가 이제야 미흡하게 해결하는 것은 정말 섭섭하고 못난 삼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성은 아니 삼성이 아니고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변해야 합니다. 사회와 소통해야 합니다. 노동자와 소통해야 합니다. 세상은 변해가는데 삼성맨들만 소통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 역시도 삼성직업병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 뭐했냐고 묻고 싶습니다. 삼성노동자들 각종 화학약품으로 병들고 죽어가는데 삼성반도체 공장 근로감독이나 처벌을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정부가 노동자 문제에 소홀한 점 너무너무 섭섭합니다.”
10년 넘게 싸워온 아버지의 섭섭함
10년 넘게 싸워온 아버지의 눈은 정확했다. 딸이 왜 죽어갔는지,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었는지, 그리고 누가 그 책임을 회피하고 방관했는지를 정확히 짚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황상기씨는 딸과의 약속을 위해 생계도 뒤로한 채 한국 제1의 대기업과 외로운 투쟁을 벌여온 바로 그 ‘아버지’ 아니던가.
“아버님 말씀대로 이 문제가 11년씩이나 걸릴 문제였나, 기업과 정부가 진작에 힘없고, 억울하게 죽어간 노동자들에 대해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고요. 아버님 말씀하시는데 많이 울컥했습니다. 그래도 이제라도 그렇게 중재안에 합의를 보게 돼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4일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에 출연한 이종란 반올림 상임활동가는 황상기씨의 섭섭함에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삼성과 정부가 외면했던 그 11년의 투쟁이 얼마나 고되고 힘겨웠을 지를 상상해보면 그 아버지의 눈물이 이해가 되고도 남지 않겠는가.
다행이지만 지적할 수 없는 것이 그래서 그 삼성과 정부의 11년이다. 황유미씨가 사망한 이듬해 반올림이 결성된 것이 2008년 3월이다. 그 이후 2012년 11월 삼성전자가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제안할 때까지 무려 4년이 걸렸고, 또 삼성전자와 반올림이 직접 협상을 시작하기까지도 1년이 걸렸다.
그 중 이명박 정부 기간에 해당하는 2008년부터 몇 년간 삼성이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가족들을 수없이 회유하는 한편 반올림의 법적인, 사회적인 활동을 방해했던 것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2014년 4월 당시 삼성전자 권오현 대표이사가 사과 기자회견을 했고, 그해 12월 조정위원회가 구성됐다.
하지만 이듬해인 2015년 7월 조정 과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삼성전자는 9월 피해자들을 위한 자체 보상을 시작했다. 반올림이 이러한 삼성전자의 자체 보상을 거부하고 천막 농성을 시작한 것이 2015년 7월이다.
“2015년도에 조정위원회가 1차 조정 권고안을 내놨을 때는 2015년도 7월인데, 그때 당시에 삼성은 경영권 승계가 거의 다 돼서 자축하는 분위기였고, 무서울 게 없었던 때였거든요. 그럴 때 삼성이 얘기하면, 다 그냥 저희 얘기는 다 묻히고, 왜곡 보도가 되게 많고, 그렇게 됐었어요. 그런데 그게 지금은 조금 바뀌었잖아요.
그 사이에 사회적 분위기도 촛불 항쟁을 거치면서 바뀌고, 정권도 바뀌고, 또 최근에 더군다나 삼성전자에서 여러 가지 부조리한 일들이 많이 드러나고, 그런 것들이 삼성 직업병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영화 <또 하나의 약속>과 황상기씨, 그리고 고 노회찬 의원
반올림은 오늘(25일) 1023일의 농성을 마무리한다. 중재안은 늦어도 두 달 뒤인 10월 중 발표될 예정이다. 24일 합의서명식에 참석한 김선식 삼성전자 전무는 “완전한 해결만이 발병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앞선 이종란 노무사의 말처럼, 국민들의 관심이, 사회적 여론이 환기되지 않았다면 삼성은 방기하고, 정부도 이에 동조했을지 모를 일이다. 황상기씨가 섭섭함 한편으로 고마운 사람들을 열거하고 나선 것 역시 그러한 삼성과 정부의 무관심에 대항했던 이들의 노력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황상기씨와 황유미씨 가족의 사연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밀착 취재한 것이 2014년이다. 그때만 해도 영화는 물론 황상기씨와 반올림의 활동이 일부 진보언론 외에 소개되지 않았을 때다. 그해 2월 개봉한 영화 역시 의심스러운 정황으로 대기업 멀티플렉스로부터 홀대를 받으며 50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쳐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그때 영화의 개봉을 축하하며 황상기씨와 반올림의 투쟁을 응원했던 이들 중 하나가 고 노회찬 의원이다. 얄궂게도, 고 노회찬 의원이 사망한 다음날 삼성과 반올림의 조정안이 발표됐다. 이 글을 쓰며 황상기 아버지의 옆 자리에서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치는 노 의원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 사진 한 장은 약자를 위해, 사회의 진보를 위해 싸우는 이들이 신뢰할 것이 서로 간의 연대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황상기씨와 11년을 싸운 반올림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25일 반올림 활동가들은 노회찬 의원의 빈소를 찾았다. 부디, 두 달 후 나올 중재안은 반올림과 황상기씨, 그리고 삼성 반도체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국민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결론으로 귀결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하성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