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세계사적 가치 지닌 역사투쟁…할머니들 꼭 지켜야”

심용환 “식민지배 문제 고발하며 싸워온 거의 유일한 활동”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가 24주년을 맞이한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율곡로 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13차 정기 수요시위에 참석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발언하고 있다. 단상 왼쪽부터 김복동, 이옥선, 박옥선, 이용수, 강일출, 길원원 할머니. <사진제공=뉴시스>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가 24주년을 맞이한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율곡로 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13차 정기 수요시위에 참석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발언하고 있다. 단상 왼쪽부터 김복동, 이옥선, 박옥선, 이용수, 강일출, 길원원 할머니. <사진제공=뉴시스>

인문학공동체 ‘깊은계단’의 심용환 대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21세기 한국 여성과 할머니들이 세계를 향해 식민지배의 문제점을 고발하며 오랜 시간 싸워오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심용환씨는 노컷뉴스와 함께 하는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위안부 문제, 우리는 왜 흥분하는가?’ 편에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세계사적인 가치를 지닌다”며 이같이 의미를 짚었다.

서울 학원가 역사 강사인 심 대표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태에서 SNS에 떠돌던 유언비어를 조목조목 반박해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동영상 강의, 역사콘서트, 강연, 저술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시민들의 역사 선생’이 됐다.

이번 ‘위안부 졸속 합의’ 사태에 대해 심씨는 “우리는 무엇 때문에 흥분하는가”라고 성찰의 질문을 던지며“할머니들을 향한 인도주의적 정서, 일본을 배척하는 민족주의적 정서, 모두 의미가 있지만 이 정도 범위를 넘어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의 여성학자들, 스즈키 유코, 이시카와 이쓰코, 우에노 치즈코 등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많은 활약을 해왔다”며 “이러한 행동은 결코 민족주의적 정서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위안부 문제를 젠더, 즉 여성의 관점으로 바라봤고 동시에 보편적인 인권의 개념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진=CBS 영상 화면캡처>
<사진=CBS 영상 화면캡처>

또 “위안부 문제는 결코 국내적인 문제가 아니”라며 “단순한 전쟁 범죄를 넘어서 과거 제국주의 시절 식민 통치 자체를 문제 삼는 지구상 거의 유일한 활동”이라고 세계사적 의미를 짚었다.

관련해 1947년 2월 10일 체결된 이탈리아 강화조약에 대해 설명했다. 제 2차 대전 후 이탈리아 문제 처리를 위해 미국을 중심으로 20여개국이 모인 회의로 심씨는 “알바니아, 에티오피아에 대한 배상 지불, 문화제 반환 등은 인정을 받았지만 리비아 문제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알바니아, 에티오피아 침략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났고 리비아는 원래 이탈리아 식민지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 독일에 대한 국제군사재판인 ‘뉘른베르크 재판’, 일본의 중대전쟁 범죄인에 대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인 ‘도쿄 대재판’도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응징이었지 결코 식민지배에 대한 응징이 아니었다고 역사적 사실들을 되짚었다.

이어 심씨는 위안부 문제는 식민지배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세계사적 역사투쟁임을 지적하고 “위안부 문제가 해결된다면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대한 전혀 다른 인식이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것을 위해서라도 위안부 할머니들과 정대협을 꼭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관련해 이동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는 한국일보 <광복 70년·한일 수교 50년의 재인식-日 과거사·배상 ‘오리발’…그 뒤엔 美의 뿌리깊은 ‘짬짜미’>(2015년) 기고에서 “1965년 한일협정은 흔히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부산물로 통”하는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51년 9월8일 48개 연합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패전국 일본에 대해 ‘관대한’ 배상을 허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 문제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는 특징을 갖는다”고 말했다.

또 이 교수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의 측면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앞서 1947년 2월10일 체결된 이탈리아 강화조약을 실질적으로 계승한 것이기도 했다”면서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이 점령한 알바니아 및 에티오피아와 그 이전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된 리비아 등에 대한 조치를 명확히 구분했다”고 설명했다.

“즉, 알바니아와 에티오피아에 대해 배상 지불을 결정했지만, 이는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의 침략 전쟁에 대한 것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하는 요시다 총리 <사진=위키백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하는 요시다 총리 <사진=위키백과>

이 교수는 “미국은 한국의 경우 이미 전쟁 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사실상 일본의 일부로서 전쟁에 가담했으므로 배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미국과 일본은 전쟁 책임에 대해서는 대립적이었지만 식민지 처리 문제에서는 이해를 공유하는 ‘공범 관계’였다”고 말했다.

그는 “한일 양국이 과거사 문제를 놓고 으르렁거릴 때마다 미국 정부가 지역 안정과 ‘미래지향’만을 강조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도 과거 식민지주의에 우호적이었던 미국 스스로의 인식과 무관치 않다”고 역사적 맥락을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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