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傳貰는 지구상에서 한국에만 있는 제도다. 오죽하면 저승 가면 옥황상제에게도 설명하기 어렵다는 관행이겠는가. 이 임대차 방식은 이른바 ‘개항’ 이후에 등장했다. 인구 도시 밀집화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빠르게 심화되었고 전세는 확산되었다.

이때부터 임대인 대부분이 실질적으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이자 없는 ‘대출’을 받아서 집을 소유하기에 이르렀다. 은행 문턱이 높던 관치금융체제는 이를 더욱 악화시켰다. 집이나 방을 빌리는 사람도 다달이 나가는 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두 가지가 맞아 떨어지면서 90년대 중반에 전세는 전체 가구 30%(400만 가구 이상)에 육박했다.

마침내 오늘날 집 한두 채 값을 가진 업자가 1백 채에서 1천 채가 넘는 집을 보유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는 집 없는 사람들 보증금을 관행과 제도를 악용하여 약탈하는 행위다. 세입자에게 이 돈은 그동안 모아온 재산 전부이거나 가족과 은행에서 빌린 빚까지 들어 있는 그야말로 인생 보증금이다. 이를 잃고 삶을 스스로 저버리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물산장려운동은 식민치하에서 단지 토산품 사서 쓰기만은 결코 아니었다. 이 운동은 서울보다는 평양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중심에는 일본인들에게 땅과 집을 빌려야 했던 차가인(세입자)들의 저항이 있었다. 이미 임대인 보호법이 생겨서 갈취가 어려웠던 일본 ‘내지’와 달리 식민지 한국에서는 집을 통한 농간과 착취가 한결 손쉬웠던 터였다. 일제는 식민지에는 자신들이 만든 서민보호 법률을 적용하지 않았다. 도리어 해협을 건너온 일본인 소액자본이 한국인을 맘껏 약탈하도록 제도를 통해 조장했다. 이 제도는 여지껏 그 근본을 완전히 뜯어고친 적이 없다.

장기간에 걸친 한국사회 주택난의 구조적 모순은 국가 주택 정책 빈곤과 이를 대신해 민간이 주택문제를 사실상 도맡아온 산물이다. 인구 도시밀집과 주택값 폭등은 늘 함께 해왔고 제도는 뒷북만 쳐왔다. 아파트 등 집단주거공간에 건축회사 이름을 달고 살아가고 있는 건 이를 기형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주거 문제에 관한 한 국가는 존재 이유가 무색했다.

전세 사기를 당해 거리로 내쫓긴 난민들이 떠돌고 있다. 이들은 전쟁을 겪고 있는 것도 아니고 농촌이 분해되어 고향을 떠난 것도 아니다. 간접세 국가인 한국에서 이들은 어김없이 납세자들이다. 세금을 낸다는 건 적어도 제도와 관행에서 보호받을 권리를 지녔다는 뜻이다.

오늘 전세 사기를 당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약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소규모 주택을 빌려서 세 들어 살던 이들이다. 이들을 방치한다는 것은 국가가 납세의무를 요구할 자격을 스스로 상실한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정부가 당장 서둘러야 할 일은 이 난민들이 살던 집을 사들여 재임대하는 공공주택화 과정이다. 집 없는 약자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확대하는 분기점으로 삼을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다. 적어도 조선총독부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 전세사기깡통전세피해자전국대책위원회 등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지난 20일 서울 전쟁기념관 앞에서 대통령 면담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대통령실 관계자에게 면담요청서를 제출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