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경기지사가 1일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의 정부 수립 단계와는 달라 친일(親日) 청산을 못 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美) 점령군과 합작해서 다시 그 지배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고 말했다. 이 지사는 이날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고향인 경북 안동 ‘이육사문학관’을 찾아 이렇게 말하며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 지사 발언은 대한민국이 친일 세력이 주도해 건국됐고 미군이 점령군이라는 인식을 보여준 것으로, 대선 과정에서 역사 논쟁이 불거질 전망이다. 앞서 김원웅 광복회장도 고등학생 대상 강연에서 미군을 점령군, 소련군을 해방군이라고 말했다. 야당에선 ‘대한민국 출발을 부정하는 충격적 역사 인식’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지난 3일 <조선일보>의 <李 “친일·美점령군이 대한민국 수립”> 기사의 서두다. 그러면서 <조선일보>는 “이 지사 측은 ‘역사적 팩트를 말했을 뿐’이라며 ‘미 정부 공식 문서에 미군이 스스로를 점령군이라고 표현한 게 남아있다’고 했다”면서도 여야 정치인들의 반박을 비중있게 실으며 논란의 불을 붙였다. 

▲ <이미지 출처=조선일보 홈페이지 캡처>

기사 말미 <조선일보>는 “정치권에선 이 지사 발언으로 대선 국면에서 역사 인식 논쟁이 불거질 것으로 보고 있다”며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 초등학교 6학년이 배우는 국정 사회 교과서에서 ‘1948년 국제연합은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다’는 부분이 통째로 빠져 논란이 일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조선일보>의 방향타를 덥썩 물었다(?). 윤 전 총장은 4일 페이스북에 <셀프 역사 왜곡,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는 글을 통해 “광복회장의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황당무계한 망언을 집권세력의 차기 유력후보 이재명 지사도 이어받았다”며 “이에 대해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어떤 입장 표명도 없다는 것이 더 큰 충격”이라는 장문의 비난 글을 게재해 ‘색깔론’을 부추겼다. 

논란이 일수밖에 없었다. 이미 미군정 문서에까지 ‘점령’(Occupy)’이라 명시된 표현을 문제삼은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인식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4일 <한겨레>는 <윤석열, 이재명 ‘미 점령군·친일파’ 발언에 철 지난 색깔론 대응>이란 기사에서 “‘윤 전 총장이 극우·독재정권의 역사관을 드러냈다’는 비판이 나온다”며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한겨레>가 해당 기사를 통해 인터뷰한 역사학자들의 비판을 보자. 

▲ <이미지 출처=한겨레 홈페이지 캡처>

역사학자들 연이은 비판에 이은 <한겨레> 출신 김의겸 의원의 일침 

“1945년 9월 미국이 들어와서 진주할 때 공식 용어가 점령군이다. 이 지사 발언이 논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잘못된 발언은 없다. (윤 전 총장 등이) 점령군이라는 용어를 어딜 침략해서 강제 점령한다는 뉘앙스를 붙여 공격하는데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지적(이다).”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분단과 독재체제,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는 사관을 정통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지사의 발언이)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윤 전 총장의 페북 글은 얼마나 현대사를 단정적이고 편파적으로 보는지 알 수 있고 극우 이승만과 전두환의 독재 역사관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 소장도 5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윤 전 총장이)무지함을 그대로 드러냈다”며 “백선엽이 편찬한 ‘6.25전쟁사’에도 점령군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도 꼬집었다. 

한편, 역사학자 이외에 ‘<조선일보>가 쓰자 윤석열 후보가 참전’한 이번 논란을 “심판이 선수로 뛴다”는 언론의 측면에서 비판한 이도 있었다. 바로 <한겨레> 출신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이었다. 그는 5일 페이스북글에서 “(<조선일보>가) 촛불 정부를 공격하는 세력의 ‘총사령부’가 된 지 오래라는 게 내 지론”이라며 이번 논란을 색다르게 해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재명 지사의 ‘점령군 발언’은 1일 초저녁에 나왔다. 현장에 기자들이 있었고 동영상까지 공개가 됐다. 그러나 별일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이틀 뒤인 3일 아침 뒤늦게 조선일보가 신문 1면과 3면 그리고 사설로 대대적으로 보도를 시작했다. 조선일보가 ‘문파’를 공격할 때 즐겨 사용하던 ‘좌표’를 찍은 셈이다. 유승민 하태경 등 국민의힘 주요 인사들이 이 전선에 동원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른 언론사들은 이재명 지사의 발언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동아일보가 5면에 조그맣게 보도한 것 외에는 다른 기사를 찾아볼 수가 없다.

조선이 포문을 열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도 기다렸다는 듯이 이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조선일보의 말투를 고대로 따라했다. 더 나아가 ‘대통령 입장 표명도 없다’고 엉뚱하게 문재인 대통령을 끌어들였다. 이어 수구 언론이 줄줄이 뒤를 따랐다. ‘점령군’ 발언이 모든 쟁점을 덮어버렸다. 가관인 건 중앙일보다. 조선일보보다 이틀 뒤늦게 보도를 하면서 1면 톱에 4, 5면 두 면을 털었다. 최장집 교수와 인터뷰까지 실었고, 사설에 만평까지 보탰다. 조선일보에 선수를 뺏긴 걸 양으로라도 만회하려는 듯하다.”

그럴 듯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이 지사의 대선출마 선언 이후 사흘이 지난 시점에서 윤 전 총장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색깔론’을 덧씌우며 논란에 ‘참전’했다는 사실만 놓고 봐도 그러하다. 김 의원은 이에 대해 “2일 윤석열 총장 장모의 징역 3년 선고가 결정적 이유일 가능성이 높다. 뭔가 흐름을 끊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고 풀이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5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를 방문해 주한규 원자핵공학과 교수와 면담 후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끝이 아닌 시작

“그러지 않으면 윤석열 검증이 급물살을 탈 것이다. ‘금지옥엽’ 키워낸 후보인데 이대로 떠내려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 휴지통에 버려뒀던 이재명 지사의 발언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이 지사의 말을 조금만 뒤틀고 부풀리면 사람들의 시선을 ‘윤석열 검증’에서 ‘이재명 발언’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 조선일보로서야 그 정도 잔기술은 식은 죽 먹기다.

윤석열 검찰총장과 조선일보는 ‘조국 대첩’ 때 동맹관계였다. 물론 상급자는 윤 전 총장이었다. 정보를 쥐고 배분하는 권력이 검찰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선일보가 한길 위로 보인다. 지금부터 중요한 건 국면을 어디로 끌고 가느냐는 전략적 선택, 그리고 실제로 그걸 실행할 수 있는 선전선동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실제 윤 전 총장의 장모 최씨의 구속수감 직후 <중앙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이 잇따라 비판 기사를 쏟아내면서 ‘윤석열 띄우기’를 포기한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왔다. 그러던 차에 <조선일보>가 ‘이재명 색깔론’을 띄웠고 윤 전 총장측이 이를 덥썩 물었다는 김 의원의 해석은 꽤나 설득력이 높아 보인다. ‘장모 구속’으로 인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라면 다급했던 윤 전 총장 측은 무리수에 가까운 ‘색깔론’까지도 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장모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윤석열 총장은 총사령부 조선일보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먼저 중도층에서 뿌리를 내리겠다던 윤 총장의 애초 구상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이번 일을 계기로 조선일보의 능력은 한층 빛나 보이고, 윤 총장의 단점은 더 뚜렷해졌다. 윤 총장의 첫 행보가 철 지난 색깔론이라는 건 윤석열의 본원적이이자 내재적인 한계로 보인다.” (김 의원의 5일 페이스북글 중에서)

결국 위기에 봉착했을 때 ‘선수’의 본질이 드러나는 법이다. ‘장모 구속’이란 위기를 맞은 윤 전 총장은 ‘조선’이 제공한 ‘이재명 색깔론’을 궁여지책으로 물었다. 한데 어떡하나. ‘장모 구속’은 끝이 아닌 시작인 것을. 

통장잔고 위조사건 등 장모 관련 사건은 물론 부인 김건희씨와 본인 사건까지 줄줄이 대기 중이지 않은가. 그런 가운데 지난 주말 내내 김씨가 연루된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을 제대로 요약한 KBS <시사기획 창> 홍사훈 기자의 요약 동영상은 조회수 200만을 넘기기까지 했다. 

출마(정치입문) 선언과 함께 위기에 봉착한 윤석열 전 총장은 또 어떤 무리수를 덥썩 물을 것인가. ‘조선’은 언제까지 윤 전 총장에게 떡밥을 제공할 것인가. 

▲ <이미지 출처=KBS 유튜브 채널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 영상 캡처>

하성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