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할 법도 하건만,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는 법이 없었다. 징글징글할 만도 한데 ‘애니’라는 이름의 이 아줌마는 늘 세상이 궁금하고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자가 동력이 안에서 잘 돌아가는 사람 같았다. 대체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솟아나오는 것일까.

영화 <스페셜 애니(Special Annie)>는 2015 20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초청작이다. 김현경 감독이 뉴욕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만난 미국 아줌마 애니의 이야기다. 아니 어쩌면 애니를 통해 감독이 마주한 자기 안의 깊고 깊은 상처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성장해서도 여전히 앓는 상실감에 대한 따뜻한 공감과 다독임도 있다.

영화제에서 소개한 줄거리는 이렇다. ‘뉴욕에서 혼자 사는 나는 AIDS를 앓고 있는 애니를 만나 친구가 된다. 애니를 통해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배워가는 나는 자신의 가족과 스스로를 반추하는 시간을 갖는다. 자전적인 에세이 형식으로 한 인물을 담아내고 풀어가는 과정이 담백하고 솔직하다.’ 당시 애니는 에이즈(AIDS·후천성 면역 결핍증)를 앓고 있고, C형 간염을 치료 중인 환자였다. 충격적일 만큼 ‘스페셜’하게 살아온 애니는, 자기처럼 버려진 채 바이러스에도 감염된 검은 고양이 ‘스페셜’을 입양해 정성껏 키운다.

“난 아주 일찍 철이 들어야 했어. 그래서 내 안에 있던 어린 시절을 누릴 수가 없었지. 너무너무 많은 폭력을 당했어. 폭력을 잊으려 마약에 손을 댔지. 마약을 사기 위해 매춘, 절도, 닥치는 대로 다했어.”

▲ <이미지출처=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홈페이지>

그렇게 가난한 집 아이로 자라나, 폭력에 찌든 상처들을 잊으려 마약에 취했고 마약을 사기 위해 매춘을 일삼아 살다가,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범죄자로 옥살이를 하고 급기야 에이즈 환자가 돼 말년을 보내고 있는 애니. 인생의 ‘유일한’ 기회였던 대학입학을 포기하게 했던 큰아들의 임신, 그럼에도 아이를 낳아 키웠고 병으로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슬픈 엄마. 이 얼마나 기구하기 짝이 없는 인생인가! “독하지 않으면 안 됐던” 감방 시절까지 견뎌내고, 지금은 화사한 얼굴로 고양이를 키우고 사는 그녀. 그저 겪어온 일을 건조하게 나열만 해도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 그녀는 늘 웃는 얼굴이다.

애니는 담담하다. 평정을 잘도 유지한다. 늘 아이처럼 호기심 많은 눈으로 세상을 대하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노래를 부르는 애니.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을 때조차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고 안아주며 여기까지 왔다. 남들은 쉽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힘들게 버텨서 받은 ‘삶’이 에이즈냐고, 이 무한긍정의 환자를 어이없게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니는 말한다. “신의 은총이 항상 나를 지켜준 것 같아. 왜냐하면 내가 아직 이렇게 살아 있잖아!”

영화는 뒤로 갈수록 점점 감독 자신과 애니의 이야기가 서로 조우하며 뒤섞이는 것을 목격하게 한다. 생판 남일 것 같던 그들은 상대방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가장 내밀하고 소중한 것을 찾아낸다. 그리고 서로에게 감사한다. 물론 각자의 인생을 충분히 돌아보며 수많은 혼란을 견뎌낸 뒤에 찾아오는 깨달음이다. 감독이 굳이 에이즈 환자 애니를 만나러 찾아간 것도, 그녀의 이야기를 성심껏 담아낸 것도 실은 감독 자신의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빚과 망설임, 가족에 대한 사랑과 상처 등에서 기인했다는 것도 관객은 차차 알게 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카메라를 든 사람과 찍히는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그냥 늘 붙어 지내는 두 친구의 기록처럼 느껴진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달려가 말을 걸면 넉넉한 품으로 안아줄 것 같은 애니 아줌마의 미소가 한동안 마음속에 맴돈다. 영화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김현경 감독이 전한 애니의 근황은 완연한 에이즈 환자처럼 깡마르고 약해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제 창이 넓고 환한 집으로 이사가 기뻐한다는 애니. 방금 전 87분짜리 다큐에서 본 사람의 ‘후일담’을 귀를 쫑긋 세우며 듣고 있는데도, 마치 잘 아는 이웃의 안위를 함께 걱정하는 듯한 진지함이 극장 안에 흘렀다. 이 영화의 힘이다.

영화 말미에, 생일날 미역이라는 이름의 ‘해초 덩어리’를 먹는 한국인 친구는 애니에게 묻는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다면 몇 살 때냐는 질문이다. 애니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듣는 이를 왈칵 눈물 나게 하는 꾸밈없는 고백, 그것이 애니가 오늘 웃으면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답이다.

▲ <이미지출처=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홈페이지>

“돌아가고 싶지 않아. 돌아갈 필요 없어. 앞을 보고 살아야지. 같은 실수를 되풀이 했을 거 같아. 그 실수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되지 않았겠지.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거야.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