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에 접어든 무더운 사이공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다. 원래는 여러 사람이 둥글게 모여서 춤 추고 노래하는 걸 캐럴이라고 한다. 프랑스 말에서 나왔다. 난데 없는 캐럴 방송은 그날 오전 10시 45분에 시작되었다. 노래는 빙 크로스비 Bing Crosby가 1947년 발표한 ‘흰 눈 내리는 성탄일 White Christmas’였다. 1975년 4월29일, 월남이었다.

그 노래는 작전명 Operation Frequent Wind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미해병대가 주도하는 비전투인력 철수작전이었다. 사이공 주재 미국대사관 옥상을 통해 베트남 마지막 철수작전은 진행되었다. 빙 크로스비 노래는 사이공이란 도시에서 울린 마지막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다. 이튿날 남베트남 정부 사흘 짜리 대통령 즈엉반민은 항복문서에 서명했고 곧 사이공은 호치민으로 도시 이름을 바꾸었다. 

그날 한국인을 싣고 남중국해에 머물고 있는 미 제7함대로 날아가기로 굳게 약속했던 CH-47 치누크 Chinook 수송용 헬리콥터는 끝내 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크리스마스는 오직 자기들만의 ‘White’ Christmas였다. 끝내 사이공을 떠나지 못한 한국인은 대략 170여명이었다. 그들은 시한폭탄이 설치되어 있어서 곧 터질지 모른다는 말이 퍼지고 있던 미국 대사관을 서둘러 떠나야 했다. 버림 받은 자들의 낙담과 불신과 불안이 현장에서 생성시켜낸 게 ‘시한폭탄’이었다. 

한국인들은 짐보퉁이를 들고 잔류한 한국 외교관을 따라 차례로 사이공 주재 프랑스대사관, 일본대사관 등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거리에는 더 이상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리지 않았다. 사이공을 압박해 들어오는 북베트남 군대의 포소리가 가깝고, 난사하는 총소리가 귓전을 스치고 갔다. 월남에서 함께 피를 쏟은 미국의 혈맹 한국인들은 누구를 더 야속해야 할 겨를도 없이 다시 사이공 시내로 숨어들어가 떠돌다가 붙잡혔다. 

감시 대상이 된 한국인들은 월맹(지금 베트남 정부)의 요구에 따라 자술서를 쓰고, 북한에 충성하겠다는 맹세까지 해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가장 나중에 월남에서 귀환한 한 외교관은 이를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짧게는 3개월에서 1년, 길게는 5년을 더 옥에서 견디면서 고국에서 오는 구출 소식을 기다려야 했다. 170여명 모두는 초여름에 들려온 사이공 방송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보내는 신호를 믿었던 이들이었다. 

캐럴에 나오는 단골 루돌프는 1939년 겨울 시카고에 있는 백화점 몽고메리 와드Montgomery Ward 판촉물에 처음 등장했다. 그 동물은 사슴이 아니고 Reindeer, 곧 순록이다. 여기에 곡을 붙인 게 ‘루돌프 빨간 코 순록 Rudolph The Red-Nosed Reindeer’이란 노래다. 1949년도였다. 따라서 월남 사이공 방송 ‘White Christmas’(1947)에 ‘사슴’이 나올 수는 없었다. 

▲ 서해성 작가

순록을 순화해서 사슴으로 바꿔 부르는 오직 한 나라가 한국이다. 순록은 짐썰매를 끌 수 있지만 사슴은 거의 어렵다. 그 사슴은 그날 사이공에서 배신당한 동맹을 망각한 채 이 순간에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르면서 서울 거리를 질주하고 있다. 내리지 않는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거리에서 들려오면 문득 헬기 프로펠러 소음 환청이 함께 들린다. 사이공 미국대사관 뒷마당 수영장 모퉁이에서 오지 않는 헬기를 기다리던 한국인 170여명의 초조한 심장박동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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