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푸틴 시대를 어떻게 끝낼 것인가]
- 주술국가 저편으로 가는 여행 안내

본명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노비흐. 라스푸틴을 제거함으로써 러시아 귀족들은 짜르의 실정이 한 괴상한 승려에게로 이전되길 바랐고 어느 부분에서 이는 성공했다. 지금도 걸핏하면 라스푸틴이 괴승怪僧으로 등장하는 것 자체가 그렇다. 권력이 괴승에게 의지했다면 이는 괴승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보다는 전적으로 통치자 짜르의 잘못이다. 라스푸틴은 사실상 공개적으로 암살(1916)되었고 죽은 뒤에도 러시아 제국의 종말(1917) 원인 제공자라도 되는 양 온갖 오명을 뒤집어쓴 채 아직 온전히 저승에 매장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라스푸틴이 잘못이 없다거나 부패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뜻은 전혀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5년 러시아인들은 라스푸틴이 황제를 대독 전선에 내보낸 뒤 게르만 혈통의 황비와 간음한다고 여기고 그를 독일 스파이로 믿어버렸다. 진작에 그를 궁으로 불러들였을 때부터 짜르는 이미 상황도, 판단도, 통치도 정상적이지 못했다. 러일전쟁 패배, 피의 일요일 학살, 제1차 볼셰비키 혁명 등으로 서부에서 동부까지 러시아 전역이 온통 혼동스러운 1905년이었다. 짜리즘은 통치체제로서 이미 명백히 불구상태였음에도 니콜라이 2세와 귀족과 치안세력은 이를 유지하기 위해 폭정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라스푸틴이 등장하는 것은 3백년 로마노프 왕가가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라스푸틴은 문맹자가 거의 대부분인 서부 시베리아 시골 포크로프스코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우편 마차를 몰기도 하는 농부였다. 그 또한 일자무식 까막눈이었다. 라스푸틴은 아홉 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고, 팔다리 틱 장애를 앓았고, 누이 한 명과 함께 가까스로 살아남아 어른이 되었다. 나머지 일곱은 먹지 못하거나 병으로 죽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글자를 배우지 못한 채 시베리아 언 땅에 묻혔다. 스무 살이 된 라스푸틴이 고작 몇 달 수도원에 다녀오자 동네 사람들은 대환영을 했다. 요컨대 그 정도로도 그는 근동에서 개명하거나 출세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말씀으로 걸식을 하면서 라스푸틴은 성산으로 불리는 그리스 아토스산에 산재한 동방교회의 성지 수도원들을 방문했다. 이 방랑 수도자가 그 무렵 들었던 별명은 사악함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 ‘성스러운 바보’(yurodiviy)였다. 고향에 돌아온 뒤 그는 3천 킬러미터나 떨어진 키예프 카잔의 동굴교회에서 수도했고 그곳 교회건립을 위한 헌금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아직도 그는 괴승은 아니었다. 학교를 하루도 다녀보지 못한 그였지만 수도승들이나 사제들은 경전 해석에서 남달리 탁월한 그에게 감탄해마지 않았다. 라스푸틴이 언제 글자를 깨쳤는지, 해석과 언변에 능숙하게 되었는지는 알 길 없지만 사람들이 그의 말에 이끌렸던 것만은 여러 모로 분명하다. 짜르를 직접 만나게 된 것도 그렇지만 만나자마자 관계를 지속한 능력은 단지 ‘최면술’로 설명할 수만은 없다. 그의 언어는 직관적이었고 경험을 포함해서 행태는 신비스러웠다. 허름한 농부 차림은 도리어 분위기를 현자인 양 보이게 하였다.

거대한 빈곤을 겪고 있는 굶주린 문맹 대중 사이에 퍼질 수 있는 사상은 별 것 없다. 체제의 근본적이고도 구조적 위기로 붕괴 조짐이 밀려오고 있는 귀족 지배계급 사이에 깃들 수 있는 사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문맹 농노들은 신비주의의 말씀과 영매적 치료에 매달렸고, 귀족들은 사회위기에서 야기된 내면의 불안을 신비주의를 통해 해소하고자 했다. 신비주의와 혁명은 쌍둥이로 찾아온다. 바깥에서는 나로드니키와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혁명의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총기 있는(교활한), 반쯤 고행 수도승 흉내를 내고 있던 라스푸틴의 생존 거처가 거기였을 따름이다. 어쨌든 그는 제정 러시아 최고 권력에 다가갔고 주저없이 권세와 부패와 타락의 중심에 섰다.

라스푸틴은 군주제가 안정적으로 지속되길 바라는 봉건 귀족들과 독일에게 밀리고 있는 패전 원인을 찾고 있던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에게 동시에 증오를 받으면서 제거되었다. 그는 출신 성분, 학연, 지연도 없었고 종교적 인연 또한 허약했다. 살아있다면 몰라도 죽은 그의 손을 잡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죽고 1년 뒤 짜르 체제는 타도되었다. 볼셰비키 또한 그를 짜르체제의 부실함과 부패와 얼룩으로 동원했다. 라스푸틴은 괴승이자 전륜의 정력을 지닌 거대한 남근이 달린 치한으로 사망했다. 그가 사람들을 휘어잡은 건 기이한 신비주의였고 귀족 여인네들을 사로잡은 건 성기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라스푸틴(난봉꾼)이란 이름 또한 훗날 이 이야기에서 말미암아 영어권에서 먼저 붙인 별명이었다.(1937)

역사에서 책임을 벗어나고자 하는 자들은 늘 대속자를 내세운다. 라스푸틴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는 결코 지혜 있는 수도자도, 어렸을 적에 주먹다짐을 좋아하긴 했지만 쓸 만한 전쟁참모도, 욕심 없는 자문역도,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가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러시아 짜르체제 붕괴를 책임질 만큼 되는 인물은 더구나 못 되었다. 도리어 이러한 발상이야말로 괴이쩍다. 따지고 보면 그는 황제 편도, 황비 편도, 귀족 편도, 농노 편도, 혁명가 편도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자기 편이었다. 짜르는 라스푸틴을 암살한 사람들을 기소하지 않았다. 힘 없는 괴승을 쓰고 버렸다는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짜르 권력은 라스푸틴을 죽어 마땅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통치에 대한 자기 실정을 떠넘기려고 했다는 뜻이다. 이때라도 짜르가 국가와 대중에 대한 책무를 깊이 깨달았다면 이듬해 일어난 혁명에 그토록 쉽게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지 않았다기보다는 적어도 얼마간은 더 버텨냈을지도 모른다.

▲ 서해성 교수 (성공회대 교수)

오늘 한국에서 라스푸틴이라는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최고 통치자 옆에 기생해온 한 여인과 그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인연의 역사, 또 참모들에게만 책임을 지우게 한다면 이 권력의 최후는 더 비참하리라는 예언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구구하게 글을 썼다. 라스푸틴을 처형하는 것으로 로마노프 역사는 연장되지 않았다. 짜르와 마찬가지로 현 상황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대통령에게 있다. 짜르체제처럼 주술에 매달려서야 겨우 유지되어 온 이 권력은 성격 자체가 괴이한데다 너무 낡았을 뿐 아니라 출생 자체가 불구였다. 이제 남은 일은 하야든, 퇴진이든, 탄핵이든 이 권력을 송두리째 교체하는 일 뿐이다. 비로소 거기서부터가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