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익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얄팍해지는 사람이 있다. 영화계에서는 두 인물이 떠오른다. 제목에서 봤다시피 이준익과 강우석이다. 물론 나는 지금부터 이준익이 성숙의 아이콘이며 강우석은 퇴보의 아이콘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그 근거는 역시나 작품이다. 지난 봄 이준익이 선보인 <동주>는 그가 작품 활동을 거듭할수록 익어가고 있음을 확인시켜준 걸작이다. 반면 추석 연휴를 노리고 개봉한 강우석의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그의 창의성이 나락으로 떨어졌음을 방증한 작품이다.

사실 두 사람은 출발부터 달랐다. 이준익은 세종대 회화과를 다니다가 대뜸 극장에 취직해 포스터와 전단지 만드는 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한국영화로는 <변강쇠>나 <티켓>, 외화로는 <로보캅>, <백투더 퓨처>, <미션>, <볼레로>, <양들의 침묵> 등 1980년대 개봉한 굵직한 영화의 광고 비주얼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그러다가 영화 수입업에 손을 뻗었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놀라운 두 번째 장편 연출작 <메멘토>와 존 카메론 미첼의 역작 <헤드윅> 등을 수입해 국내 관객들에게 소개했다. 그가 영화 감독이 된 계기는 “아이들이 보고 자라는 것이 모두 외국 것”이라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쓴 시나리오가 <키드캅>이라는 어린이 영화였다.

이후 그는 영화 수입을 위해 해외 영화제를 다니다가 “한국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외국인들에게 짜증이 나” 코믹 시대극 <황산벌>을 연출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왕의 남자>로 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에겐 늘 빚이 따라다녔다. 해외 예술영화 수입으로 20~30억의 빚을 졌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직접 연출 일선에 나서게 됐으니, 사람의 삶이란 새옹지마라는 게 그의 영화 인생이 고스란히 증명한다.

사실 이준익의 영화는 평단의 엇갈린 반응을 얻었다. 흥행도 기복이 심했다. <황산벌>, <왕의 남자>, <라디오스타>까지는 그럭저럭 흥행 감독이라고 불렸지만 이후 만든 <즐거운 인생>과 <님은 먼곳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평양성>까지 줄줄이 실패를 거듭해야 했다. 그가 <평양성>의 실패로 상업영화 은퇴를 선언하자, “이준익의 시대는 끝났다”는 얘기가 충무로 안팎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소원>으로 은퇴 선언을 번복함과 동시에 흥행에서도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만든 두 편의 시대극 <사도>와 <동주>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는 극찬을 듣게 되었다.

▲ 이준익 감독 영화 <동주> 포스터

이준익의 영화 인생은 그 자체로 롤러코스터였다. 어쨌든 그 사이에 그는 포스터 만들던 디자이너에서 시대를 논평하는 예술가로 성숙했음을 우리에게 입증해 보였다. “성장주의 패러다임이 성숙주의로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그의 지론은 그의 인생 안에서 이미 실현된 듯 보인다.

이준익에 비하면 강우석은 그야말로 정규 코스로 영화를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중퇴한 그는 곧바로 충무로 연출부로 영화 일을 시작했다. 1989년 <달콤한 신부들>로 감독 데뷔한 그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투캅스 2>, <공공의 적> 등 주로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 흥행시켰다. 1990년대부터 최초의 천만 영화로 등극한 <실미도>까지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최고의 흥행사’라는 별명이 따라 다녔다. 실제로 강우석은 2000년대 초반까지 영화주간지 씨네 21이 매년 발표하는 ‘영향력 있는 영화인’ 순위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켰다. 평단에서도 그의 팬을 자처하는 오동진 같은 평론가가 있을 정도이다.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행보는 야심찼다. 시네마서비스라는 배급사를 만들어 대기업 계열의 영화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숱한 기획 영화들을 양산했다. 그러나 시네마서비스 브랜드의 기획 영화들은 늘 거기서 거기였고 그는 경영난에 봉착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CJ 엔터테인먼트의 우산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이런 족적과 별도로 강우석의 최근 작품들은 그가 나이 들수록 성숙하는 예술가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2006년에 내놓은 <한반도>는 그 상징적 사례였으며 사실상 강우석 시대의 종결을 알리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에서 강우석은 노골적인 반일 감정을 흥행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를 펼친다. 남북한간의 경의선 연결에 일본이 반대를 하는데, 그 반대의 이유가 한일합방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주인공이자 사학자 조재현에게는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의 국새를 찾아 나서는 임무가 주어진다. 국새의 행방을 놓고 한일간의 대립 구도가 격화된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은 둘째 치고 역사 의식과 관련해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즉,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대한제국에서 찾는 모순이다. 헌법에도 명시된 바와 같이, 그리고 남부끄럽게도 최근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가르쳐주었듯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대한제국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봉건 왕조와의 단절이 갖는 의미를 의식하지 못하는 건 민족주의라기보다 초보적인 국수주의에 가깝다. 그러니 국내 언론 앞에서는 “영화로라도 일본을 들이 받고 싶었다”고 호기롭게 말한 강우석이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반일 영화가 아니”라는 옹색한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 입을 가지고 두 말을 하는 이를 일컬어 우리는 ‘얄팍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의 ‘초딩적’ 수준의 민족주의는 그가 기획 제작하고 김유진 감독이 연출한 <신기전>에서도 고스란히 투영된다. 세종대에 만들어진 신병기를 소재로 삼았지만, 이 영화는 명나라와의 한판 전쟁이라는, 있지도 않은 역사를 창조해낸다. 명을 아버지의 나라로 모셨던, 그래서 청의 외침까지 받는 굴욕을 당했던 조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을 버젓이 만들어 놓고 이른바 ‘약소국 콤플렉스’를 해소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 정도면 유치원 수준의 민족주의다.

강우석이 최근 내놓은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는 영화 감독으로서의 그의 깊이를 또 한번 고백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지도는 남아 있지만 구체적인 행보는 거의 알려져 있은 인물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은 것까지는 좋았다. 상상력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는 유리한 이점도 계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차승원은 아무리 봐도 TV 오락프로그램 ‘삼시세끼’의 차승원이지 강우석에 의해 영화적으로 재해석된 인물 ‘고산자’로 상상되지 않는다. 한술 더 떠, 차승원의 입을 빌어 기어코 “거 내가 삼시 세끼 다할 수도 있구만”이라는 대사를 넣어 흥행에 대한 조바심을 드러내고 만다. 냉정하게 말해 이 영화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강우석은 여전히 감독이 되지 못했다.’ <투캅스>를 조선 시대 버전으로 각색한 <두포졸>을 기획했지만 영화화에 실패한 건 또 하나의 상징적인 사례다. 그는 나이를 먹었으나 오히려 퇴보한 것이다.  

▲ 강우석 감독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