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출처=JTBC 드라마 ‘송곳’ 홈페이지>

먹먹했다. 왜 상처 받은 사람은 그 상처를 벗어나기가 그토록 힘든 것인가. 왜 약자들끼리 더 보듬어주지 못하고 서로의 모자람을 더 미워하는 것일까. 그 마음 알기 때문에 속상해서 그러는 것일까. 그럼에도 어깨를 기댈 곳은 피차 ‘없는 사람들’뿐이어서, 그 비가 새는 지붕 같은 서로를 믿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눈물 훔치면서도 함께 가야 하는 이유다.

JTBC <송곳>(토,일 밤 9시40분)은 최규석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총 12회 중 지난 주말까지 10회가 방영되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극중 <송곳>의 배경이 되는 푸르미마트는 대형마트 한국 까르푸다. 이랜드 그룹의 홈에버에 매각되면서 대대적인 인원감축과 해고가 발생하고, 파업으로 이어졌던 실제 사건을 다루고 있다.

22일 방영된 드라마 <송곳>10회는 각 인물들의 오래된 상처를 들쑤시고 후볐다. 아파서 소리 지르고 분노하고 이성을 잃을 정도의 통증이었다. 앞서 9회에서 푸르미마트는 노조원들에게 월급을 절반만 지급했고, 노조는 지방노동위원회에 제소한 끝에 ‘미지급 임금의 지급 명령’ 판결을 받아냈다. 하지만 사측은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한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대다수 노조원들 입장에서, 몇 달은 걸릴 거라는 재심은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카드는 정지되고 병원비는 밀리고... 생활비가 없는데 누가 더 버틸 수 있을지 서로가 염려스럽다. 싸움이 길어지고 노조의 중심축인 이수인(지현우 분) 과장은 ‘소를 취하하면 미지급 임금을 지불하겠다’, ‘지급이 안 되는 건 다 네 탓’이라는 사측의 온갖 협박에 시달린다.

▲ <이미지출처=JTBC 드라마 ‘송곳’ 홈페이지>

노동문제상담소장 구고신(안내상 분)은 과거 학생운동을 하다 끌려가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만성 신부전증을 앓고 있다. 10회에서 고신은 자신의 노동상담소 건물에 새로 온 경비원이 과거의 고문관임을 알아본다. 이십여 년 간 하루도 잊어본 적 없던 그의 트라우마가 본격적으로 깨어난다.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고신은 날마다 옛 고문관과 마주하게 된 상황을 설명한다. 그를 용서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용서하고 못하고 할 게 뭐가 있는데. 내가 그 사람한테 고문당했나, 국가한테 고문당한 거지.”라고 쿨한 척 말한다. 친구들이 되레 “너 사람이야. 사람이면 그렇게 안 돼.”라고 화를 내며 말한다.

하지만 이 또한 ‘외운 정답’이었을까. 피범벅이 되어 “우리 고신이는 참 똑똑해”라던 고문관 앞에서 비굴하게 애걸했던 그때의 암기력처럼 말이다. 살기 위해 ‘외운 정답’을 자술서에 쓰고 또 쓰며 “진심으로 그의 애정을 갈구했던” 상처가 어제인 듯 되살아난다. 고문실과 현재의 사무실이 분간이 가지 않는다. “수학 못한다던 그 아들” 앞에서는 그만 미친놈이 되어 그들 가족을 비웃고 모욕주고 싶다. 고문관의 손자 앞에서 자기의 “배에 난 구멍”을 보여주고 싶다. 중심은 잃은 지 오래다. 어쩌면 그때 그 고문실에서 이미 살해되었는지도 모른다. 실성할 것만 같다. 아니 이미 실성했는지도 모른다. 견딜 수가 없다.

▲ <이미지출처=JTBC 드라마 ‘송곳’ 홈페이지>

모든 것을 구소장과 의논하던 수인은 침울해진다. 노조활동에 열중해 가족을 못 챙긴 게 미안하고, 불안정한 아내를 처가에 맡겨놓았다가 도로 집에 데려오긴 했지만 한없이 무기력한 자신을 본다. 아내에게도 딸에게도 미안할 뿐이다. 장인 장모, 푸르미 노조, 아니 세상 그 모든 존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있다. 이러다 자기 자신은 다 없어져 버릴 것 같다. 그럴수록 방어기제만 심해져, 더 원리원칙을 따지며 상대와의 대화를 딱딱하게 만들고 있다. 원칙만을 외워 반복한다. 인포 직원들의 노조 가입 신청에 대한 기존 조합원들의 반발에도, 매정할 정도의 원칙을 편다.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도 지친 것일까. 오해를 사기 딱 좋은 상황이다.

그러다 수인은 검사 앞에서 화를 낸다. 소장을 취하하면 미지급 월급을 주겠다는 회사의 말을, 검사가 마치 ‘대변인’처럼 늘어놓으니 참을 수가 없었다. ‘해야 한다’와 ‘내 잘못일까?’에 짓눌려 있는 수인. 회사와 세상의 온갖 협박과 강압 앞에서 점점 지친다. 그 와중에 정민철 부장(김희원 분)이 불러낸다. 자신을 내려놓은 듯 “나는 별 볼 일 없는 시시한 놈”이라며, “이수인 씨, 단 1%라도 사심이 없습니까?”라고 묻는다. 수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방식의 질문이다. 성직자에게도 해서는 안 될, 가장 무례한 방식의 질문이지만 수인은 늘 이런 식의 질문 앞에서 자괴감이 든다. 어쩔 수 없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좋은 사람. 하지만 결국 답을 못 찾을 경우, 자신에게 가혹해지는 사람.

수인과 고신은 이제 서로의 말과 행동에 불만을 터뜨리기에 이른다. 노조를 이끄는 방식, 파업에 대한 고려 자체가 충돌한다. 아니 이전과 달리, 수인이 고신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뭔가 ‘끝’을 내고 싶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듯하다. 청소원들의 야유회에서 빚어진 갈등은 표면적 이유였을 뿐이다. 고신은 말한다. “이수인 씨, 끝내고 싶은 거지? 도망치고 싶은 거지?” 수인은 운다. 파업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합리적인 이유라 해도 심사숙고해야 할 엄청난 사안을 “끝내고 싶다”는 피로감과 자포자기에서 밀어붙이는 듯한 지친 마음이 터져 나온다. “소장님처럼 될까 봐요. 불행... 하시잖아요. 편히 자고 싶어요. 음식 맛을 느끼고 싶어요. 아이에게 바다도 보여주고, 아내랑 장 보고 같이 밥도 해먹고 싶어요. 지금 못 끝내면... 그걸 놓칠 것 같아요.” 뉘라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랴. 둘이 서 있는 옥상 풍경이 먹먹하다.

▲ <이미지출처=JTBC 드라마 ‘송곳’ 홈페이지>

허과장(조재룡 분) 자리에 새로 온 고과장(공정환 분)은 등장부터가 공포분위기 조성이다. 회식 중에도 젓가락으로 컵을 밀며 강제로 술을 먹인다. 폭언과 비아냥으로 강민과 준철을 이간질시킨다. 그야말로 분열 조장과 노조 탄압이 그의 주요 임무이고, 그 임무를 위해 발탁된 사람 같다.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게 그의 유일한 지침이다. 고과장은 강민(현우)과 준철(예성)의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속 깊은 우정, “화내고 소리 질러도 돼!”라고 처음으로 얘기해 줬던 친구 사이마저 노조 탄압을 구실로 짓밟으려 한다. 잔인하다.

말을 듣지 않는 존재들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되고 동원된 무수한 폭력들. 지시를 따르고 (생각없이)순응하게 만든다는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진 명령들. 사람을 대한다기보다는 일종의 폭력기계가 된 중간 관리자들. 이날 방송은 협박과 회유부터 고문까지, 그 수많은 다양한 폭력들이 어떻게 사람을 길들이기 위해 쓰이는지를 차례차례 보여준 듯했다. 말이든 행위이든 당한 이에게는 깊은 상흔을 남기며 평생 트라우마로 남는 폭력의 후유증이, 송곳처럼 시청자의 가슴을 찌른다. 아프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봐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