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한열기념사업회 홈페이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촉발시킨 故 이한열 열사의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로 잘 알려진 최병수 작가의 ‘자모 솟대전’이 열린다.

사단법인 이한열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최근 한글의 예술성에 주목해온 최병수 작가의 우리 고유의 마을을 상징하는 ‘솟대’와 우리말 자음과 모음의 어울림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전시 된다. 전시회는 11월 8일부터 내년 1월 8일까지 계속된다.

작가는 “꿈”, “시”, “길”, “사람” 등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낱말들이 가지고 있는 조형미를 철로 만든 솟대와 결합시켜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친근함과 편안함을 느끼도록 했다.

처음 그림을 시작할 무렵 이한열 열사 그림을 그리게 됐다는 최병수 작가를 ‘go발뉴스’가 전시회가 열린 첫날인 8일 신촌 이한열기념관에서 만났다. 최씨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26년이 지나 이곳에서 전시회를 하게 됐다”며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든다”며 말문을 열었다.

▲ ⓒ 'go발뉴스'

최씨는 이한열사의 대형걸개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원래 목수로 일을 하다 우연한 계기로 현장 미술을 하게 된 작가는 87년 연세대학교 문화부로부터 ‘연대 100년사’를 같이 하자는 연락을 받고 작업에 참여하게 됐고, 그 때 이한열 열사가 활동하던 동아리 ‘만화사랑’ 학생들과 연을 맺었다.

6월 항쟁 당시 작가는 개인적인 홍보일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고 쓰러진 사실은 6월 11일 중앙일보에 실린 사진을 보고 처음 알았다고 했다. “기겁을 했다. 사진 자체가 전달하는 섬광 같은 충격이 있었다”고 당시 소회를 전했다.

최씨는 이어 “젊은 학생의 희생에 분노해 그린 ‘한열이를 살려내라’라는 큰 걸개그림 이미지가 커다란 파급력이 있을지 미처 생각도 못했다”고 덧붙였다.

이한열 열사의 그림과 함께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은 최씨는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시작된 민주주의의 퇴보를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작가는 “87년 6월 항쟁 현장에서 작은 역할을 했던 개인적 입장에서 현재 상황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밝혔다.

87년 민주화 운동을 비롯, 탄압받는 노동현장에 관한 강렬한 작품들을 선보인 작가가 갑작스럽게 한글 자음과 모음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작가는 “요즘처럼 힘든 시기에 강한 작품들을 내놓으면 관객들에게 피곤함만 더 줄 것 같았다”며 “그래서 시작한 첫 작품이 ‘꿈’이라는 글자였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은 꿈 자체가 사치가 돼버린 세상이 됐다”며 “예전에 꿈은 뭉글뭉글한 형태로 무언가와 상생하려는 것이었지만 지금 꿈은 날카롭다. 단지 무엇이 돼야 한다는 목적성만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작가는 이어 “힘든 세상에 이성이나 감성의 산소는 꿈”이라며 “그런 예전 꿈들을 복원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꿈’ 이 외에도 작품으로 형상화 된 ‘시’, ‘길’ 등의 한글 단어들을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묻자 작가는 “단어 선택의 기준은 ‘선택’”이라고 말하며 “‘꿈’이든 ‘시’든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판단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거나 어떤 길을 갈 건지를 결정할 때 이러한 한글 문자들을 통해서 같이 소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최병수 씨는 환경운동가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환경운동의 뿌리에는 여전히 노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88년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폐가 녹아내릴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면서도 정작 임금투쟁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며 “공장에 환기시설을 요구하는 투쟁이 아니라 자기 몸이 녹아 내리면서도 임금투쟁을 하는 모순을 봤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그는 환경문제와 노동문제를 함께 하며 폭을 넓혀 활동해왔다.

그는 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지구촌 환경정상회담 행사장 앞에 <쓰레기들>이라는 걸개그림과 99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지구정상회의 전시회, 2002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리우+10년’ 회의 현장에서 얼음으로 조각된 펭귄이 녹아내리는 ‘펭귄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작품을 통해 지구 온난화를 경고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2000년 새만금간척사업 반대 운동과 최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운동에도 참여했다.

▲ ⓒ 'go발뉴스'

‘꿈’에 대해 묻자 최씨는 “신자유주의와 ‘1대99’ 사회가 이야기되는 상황에서 서로 상생하는 방법은 협동뿐이다. 그래서 생각한 꿈이 ‘상생기(相生紀)’라는 새로운 기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처럼 힘들고 미래가 암담한 때에 상생기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며 “(한글) 자음과 모음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시’로 만들어진 솟대로 사람들에게 위로 하는 작업을 통해 희망을 느꼈다고 전했다. 그는 여수의 한 바닷가에 ‘시 솟대’를 세워두고 근처 공장에서 일하다 휴식을 위해 잠시 나온 노동자들이 그 옆에 있는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을 노동자에게 보여주며 “시(詩)+인(人)입니다”하고 말을 건네면 거친 노동자들의 얼굴에 수줍음이 퍼지는 걸 보았다고 했다. 최씨는 “그 때 서로의 감성을 꿰는 느낌이 들었다”며 이런 식의 전국 순회전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