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내내 단 것을 먹지 않았다. 신 것도 혀 끝에 댈 수 없었다. 몸이 탈이 나거나 해서가 아니다. 

시월에 박관현이 살던 집에 찾아갔다. 남도 소작농 집을 나중에 고친 듯했다. 나이 든 누님이 이따금 들른다는 말을 전해 들었길래 그저 큰 소리로 누님을 두어 번 불러보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누가 나와달라고 청했다기보다 그를 오늘로 불러내고픈 뜻이었다. 박관현이 떠난 지 마흔 해 되는 시월이었다. 

▲ 제40주기 고(故) 박관현 열사 추모식이 열린 지난 10월12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역사의 문에서 한 추모객이 묵념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뉴시스>

불갑국민학교 뒷담에 붙어 있는 그 집에서 한 식경을 머물렀다. 바람만 이따금 쓸어가고 있는 마당 오른쪽 모퉁이엔 석류 한 그루가 서 있고 남동쪽으로 낸 대문 옆에는 감이 몇 꼭지 맺혀 있었다. 주인 없는 그 집 마당에 떨어져 있는 감 하나를 주웠다. 서울로 돌아와 책상 앞에 그걸 두고 가을 한 철을 보냈다. 감은 벌써 시들어가면서 짙은 갈매빛이 되었다. 

그해 5월15일 서울에서는 서울역 회군이 있었지만 광주는 이튿날에도 전남 도청으로 진출했다. 맨 척후에 박관현이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전남 경찰국장 안병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야간 횃불집회를 허용했다. 뒤이은 신군부의 발포 명령 또한 거부했다. 그 일로 안병하는 고문 끝에 숨졌다. 그해는 1980년이다. 

박관현은 도청 앞 분수대에 올라가 항쟁을 이끌었다. 민족민주화 횃불 성회였다. 시민들은 갑오적 밤처럼 비장했고, 항일 의병들처럼 손에 든 건 없을지라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끓는 웅변을 들은 이들은 젊은 그를 광주의 아들이라고들 불렀다. 스물 일곱이었다. 박관현은 늘 새벽을 깨우는 기관차로 살고자 했다. 민주화와 통일의 심장이고자 했다. 횃불 성회에서 그 스스로가 횃불이었다. 공수부대가 학교까지 쳐들어오자 가까스로 몸을 빼쳐 나와 서울 공릉동에서 공장에 다니고 있던 박관현이 티브이에 나오는 수배자라는 걸 알아차리고 신고를 한 건 같은 공장에 다니던 남녀 노동자 둘이었다. 그는 옥에서 40여일 곡기를 끊으면서 군부독재와 벌이는 투쟁을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이어나갔다. 권력의 방해로 그가 망월 묘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1987년이었다. 그는 죽음 이후마저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았다. 

박관현네 집은 흙담이 길었다. 황토를 바른 담장은 남도 어디나 그렇듯 겨우 시선보다 약간 높았다. 집은 빈집이었다. 에운 담벼락은 거기 선 채로 무엇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박관현이 성장했던 마을은 영광 불갑면 쌍운리 회복回福마을이다. 나갔던 복도 돌아오는  터전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박관현네들을 둔 게 회복 마을뿐 아니라 이 땅의 복이리라. 

▲ <사진=서해성 작가 제공>

열려 있는 대문을 나서다가 돌아와 노란 감 한 개를 주머니에 넣고는 죄를 지은 듯 몇 번이나 비는 마음으로 감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시대는 그 만큼씩 항쟁의 피와 넋을 훔치면서 달게 살아왔다는 걸 안다. 알이 박혀 있는 붉은 석류는 그저 조심스럽게 만져보기만 했다. 손끝이 시어서 차마 꼭지를 돌릴 수가 없었다. 

겨울이 오도록 끝내 감을 먹지 못했다. 감 도둑으로 산 세월이 목구멍 깊이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