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올 김용옥 선생. <사진제공=뉴시스>

그의 말은 바람 같고 글은 비와 같다. 말속에 말을 달리는 소리가 들리고 하룻밤 글을 읽으면 가문 날 비를 만난 풀잎처럼 생각이 일어선다. 고체 문자는 종이에 남지만 살아 있는 활자는 살과 뼈 틈새로 스며든다. 이때 그 지식은 근육이 된다. 글은 문자와 활자가 있다. 뜻이 책에 머물면 문자요, 문자가 책 밖으로 나와 삶을 생동케 하면 활자다. 도올은 이름부터 활자다. 한낱 돌이 생명을 얻으니 움직이는 도올이다. 

도올 김용옥은 논어에서 중용, 또 중용에서 맹자로, 대학과 효경을 거쳐 노자, 다시 노자를 넘어 마침내 역경까지 치달아왔다. 어언 쉰 남은 해이니 한 생을 바쳐 깊은 골방에 처박혀 있던 철학을 실천으로 다시 세웠다. 공부가 곧 실천이다. 그의 저술 노정은 이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논어에서 주역까지를 이렇게 세상을 먹이고 바꾸는 책으로 해석하고 새로 구성한 적은 없었다. 혼자 상상의 공방에서 거룩한 득도를 하는 게 아니라 만인의 득도, 만인과 함께 하는 득도가 이 공부의 목적이다. 

유학이 이 땅에 건너온 뒤 주희에 얽매이지 않고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사이로 돌아가 새 길을 도모코자 한 건 정약용이었다. 일제 옥방에서 정약용에게서 근대 가치를 이끌어내 이내 한국 유학의 주체적 뼈대를 추슬러내 집약한 건 이을호다. 태학太學, 국학國學에서 찾는다면 벌써 두 천년에 가까운 한국 유학 역사에서 도올은 이러한 가치들을 재창조해내서 구어체로 현재화하여 실천 지침으로 내놓고 있다. 이를 통치철학으로 봉사케 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인간 발견, 주체 발견이라는 민학民學 내지는 시민학으로 정립시켜내고 있는 지점은 일찍이 없던 경지다. 피 묻고 땀 흘리는 현실에서 그물을 던져 유학을 먼지 쌓인 곳집에서 끄집어내 현재의 쓸모로 다듬고 벼리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유학 세계관의 질적 변용이자 재창조로 집 이름은 같되 기둥을 바꾸는 일과 같다. 

그 과정에서 도올은 대중과 접점을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다. 도올 강연 등은 얼핏 유세하는 일인 듯 보이지만 쓸모로써 공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수강생이나 제자, 또는 도반이 없는 공부는 필시 혼자는 높이 깨달았을지언정 정작 대중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그치기 십상이다. 그 뜻을 동행해서 펼쳐 갈 사람을 얻는 것이 대중 공부다. 

철학과 지식이란 망치나 도끼 같아야 한다. 지금까지 지배해온 생각과 통념을 부수고 그릇된 세상을 쳐낼 수 있을 때라야 진짜 철학이다. 근육 없는 사상이란 뜻 없는 염불과 같다. 공맹이 오늘에 살아 있다면 이 지점에 거처해야 함은 말할 나위 없다. 도올이 저술 행동을 통해 타파하고 견인해가고자 하는 세상 또한 뚜렷하게 거기다. 

도올 세계는 유학이라는 경계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가 오래도록 최제우 생애와 사상을 두루 답파해온 일은 이 땅에서 세계의 새로운 주체와 실천으로써 철학의 현주소를 밝혀내는 일이었다. 큰 책 ‘동경대전’과 따뜻한 책 ‘용담유사’는 도올의 기개와 뼈 저리는 발견이 깃들어 있는 탐색을 거쳐 비로소 대중이 쉬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모두 그저 문자가 아니라 펄펄 살아 있는 활자다. 

▲ <도올주역강해>, 김용옥 (지은이) 통나무

얼마 전 도올은 ‘도올 주역 강해’를 내놓았다. 주역. 이 점복서라는 비결祕訣은 공자, 주희를 만나 공결公訣이 되었으나 끝내 비결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의미를 해명해놓은 것이 또한 지나치게 심오하고 복잡한 상징체계라서 어두운 우물에 얼굴을 비춰보는 일과 같았다. 어둠에 어둠을 겹쳐볼 따름이었다. 그에 따라 여러 해석은 겨울밤 흩날리는 눈발처럼 캄캄한 세상에 난무하지만 도리어 길을 덮어 도무지 뜻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어둡고 더운 길을 가다가 문득 ‘강해’를 만났다. 강해는 묵은 책을 품고 시대정신에 입각해 현재의 뜻을 설파하는 일이다. 도올은 왜 이 시대에 주역을 읽으라고 하는가. 

주역이 오늘날 필요하다면 그건 그 가치가 공결일 수 있을 때뿐이다. 대중의 비결이 바로 공결이다. 주역은 두 천년, 또는 세 천년을 넘어서 비로소 별의 동쪽에서 공결이 되었다. 혼자의 운명을 멀리 내다본다고 해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더 큰 나, 곧 대아大我의 내일을 도모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늘은 정법으로 운행한다. 도올의 주역 강해는 이 길을 찾는 나침반 구실을 하는 민民주역, 곧 민역이다. 

▲ 서해성 작가

천하 순리가 어그러진 이때에 함께 세상을 바꿀 점을 칠 수 있는 역易이 나왔다. 역이란 변화이니 이 책은 불 같으면 곧 얼음 같다. 아래 머무는 것들이 위를 향하고, 산 것이 곧 죽은 것이고, 죽은 것이 살아나니 바꿀 역이다. 이를 알아보는 점이란 그저 산가지 놀음이 아니다. 바야흐로 이 비결을 공결로 바꾸는 건 도올이 아니라 민民, 곧 대중이다. 두꺼운 민역에 침을 묻혀 넘긴다. 시호시호 때가 좋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