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발뉴스닷컴
오피니언
[시론/서해성] 효제동대첩을 아시나요
서해성 작가  |  balnews21@gmai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2.06.16  15:28:23
수정 2022.06.16  15:54:02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 (사)우당이회영기념사업회(회장 이종걸)가 이회영기념관 개관 1주년을 맞아 지난 10일 '독립운동가 기록·기념사업 라운드테이블' 행사를 개최했다. <사진제공=우당이회영기념사업회>

6월10일은 6.10만세운동 날이자, 6.10 민주항쟁일이다. 그보다 앞서 1911년 6월10일은 신흥무관학교가 생긴 날이다. 이 학교를 세운 이회영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은 한 해 전 6월10일에 맞춰 남산 북쪽 기슭에 문을 열었다. 이회영기념관에서 개관 1주년 행사로 독립운동가 기록 기념사업 원탁회의(라운드 테이블)를 개최했다. 발제자 중 한 사람인 김상옥 의사의 유일한 직계 후손(손자 김세원)의 글에 이런 대목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김상옥 의사가 가난한 노동자 출신이 아니라면 벌써 기념관이 섰을지 모른다.’ 

사회를 보면서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김상옥 의사는 어의동보통학교(효제초)를 다니다 말았다. 철공장 등에서 기술을 익히면서 공부를 한 노동자 출신 의열투사가 김상옥이다. 세상 물정이 트이면서 동대문 바로 바깥에 영덕철물상회를 열었는데 가게 건물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다. 물산장려운동 때는 말총모자를 만들어서 팔아 제법 돈도 모았다. 3.1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여학생을 위협하는 일본 순사를 때려눕히고 무단통치시대 순사의 상징인 일본도를 빼앗았다. 그 뒤 젊은 아내와 어린 아이들과 홀어머니와 모든 안온한 삶을 접고 김상옥은 무장독립투쟁에 나섰다. 

그가 다시 국내로 들어온 건 1923년 1월이었다.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김상옥이 중국을 떠나면서 동지들에게 남긴 말이었다. 그의 목표는 경성역(서울역)을 통해 일본으로 떠나는 조선 총독 사이토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12일 저녁 김상옥은 종로 YMCA 옆에 있던 식민 통치의 핵심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종로의거) 이는 일제 강점이 부당함을 알리는 일이자 제국주의 통치기관의 심장을 강타하는 일이었다. 이 종로경찰서가 초저녁에 폭탄으로 타격 당했다는 건 일제 식민지 치안력의 무력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이었다. 일제로서는 감추고 싶은 치욕이었겠지만 이 의거는 우리 민족에게는 경성에서 투사들이 활동하고 있고, 그러므로 광복이 꺼질 수 없는 희망이자 가능성이라는 걸 횃불처럼 알리는 장쾌한 의거였다. 

이후 김상옥은 경성역 건너편인 삼판동(후암동)에 있는 누이집(매부 고봉근)에 은거하면서 거사를 준비했다. 그를 추적해 온 일제 순사 20여명이 급습하자 김 의사는 총격전으로 형사부장 다무라를 현장에서 사살하고 여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후암동의거) 

일제 순사들을 따돌리면서 김상옥은 눈 내린 남산을 맨발로 내달려 왕십리 안장사(安藏寺, 安定寺, 安靜寺, 靑蓮寺. 이 절은 아파트가 되었다.)로 넘어갔다. 가는 길에 품에 넣고 있던 권총 세 자루 중 두 자루를 장충단 다리 밑에 숨겼다. 주지(金峰岩 스님)에게 음식과 승복과 짚신을 얻어 신은 김의사는 이지호 노인 집으로 향했다. 소년 김상옥이 대장간(철공장)에서 일할 때 잠시 한문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 김상옥에게 韓志한지라는 아호를 지어준 것도 이지호였다. 목숨을 건 이 노정에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준 김봉암 스님과 이지호 선생에 대해 정녕 아는 바가 없다. 벌써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김상옥은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스승을 꼭 뵙고 싶었을 터이다.  ‘韓志’라면 ‘대한의 뜻’이라는 아호다. 김상옥은 그 스승이 내려준 뜻을 행동으로 옮긴 제자였다. 

수유리 이모집에서 잠시 쉰 김상옥은 장작바리를 잔뜩 얹은 소 옆에 붙어서 동소문(혜화문)을 통과해서 대담하게 곧장 사대문 안으로 돌아왔다. 그림 솜씨가 좋은 이가 한국 대문과 소를 그리고 싶다면 마땅히 이 장면을 그려야 하리라. 그가 도착한 곳은 자신이 태어난 효제동 72, 73번지 일대였다. 그곳에는 소싯적 동무이자 동지인 이혜수가 살고 있었다. 지금과는 전혀 달리 비록 성안이었지만 고작 초가집 너댓 채가 있는 한촌이었다. 이혜수는 파묻은 권총을 찾아서 김상옥에게 가져다주었다. 효제동 의거 뒤에 끌려간 이혜수 선생은 일제 고문으로 불구자가 되어 일생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20일 이혜수 동지네 집으로 동대문경찰서 형사가 찾아왔다. 김상옥 흔적을 탐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조선인 형사 김창호였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 뒤로 어떻게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아직 우리는 친일과 매국에 대해 이처럼 어둡다. 분명한 건 그가 사과하거나 반성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22일 새벽 다들 알다시피 김상옥 의사는 집을 겹겹으로 에워싼 1천여명과 단신으로 총격전을 벌였다. 일제는 김상옥 한 명을 제압하기 위해 경성에 있던 군과 경찰을 거의 모두 동원하였다. 김 의사는 한 치 두려워하는 기색없이 결코 물러서거나 하질 않고 기다리고 준비했던 대로 권총 두 자루로 정확하게 한 발 한 발 아껴가면서 침착하게 사격을 가했다. 일제 순사와 군인 15명 이상이 현장에서 쓰러졌다. 이윽고 총알 한 발이 남은 걸 확인한 김상옥 의사는 그걸로 스스로 숨을 거두어들였다. 일제는 김 의사가 권총을 양손에 쥔 채 흙벽에 기대어 있는 모습에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들여보내 죽음을 확인케 했다. 적진(경성) 한가운데에서 벌인 이런 장렬한 투쟁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1923년 1월22일은 공식 명명되어야 마땅하다. 그 이름은 효제동대첩, 또는 단독대첩이라고 불러야 한다.(효제동대첩) 정녕 총을 쏘려거든 김상옥처럼 쏘아야 한다. 김상옥이 이룬 이 장한 효체동대첩을 기리는 김상옥 사격대회을 열어보고자 하는 게 한낱 헛된 꿈이어야 되겠는가. 

   
▲ 지난 2013년, 김상옥 의사 서울시가전 승리 90주년 기념식의 한 장면. <사진제공=뉴시스>

김상옥 의사 후손들과 함께 대첩 현장에 몇 차례나 기념 표지를 세우고 기념공간을 만들고자 했으나 여태껏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 총감독을 할 때 그곳을 지나는 버스 정류장에 ‘김상옥 의사 활동터’라는 이름을 병기한 게 고작이었다. 그 분을 기록하고 기릴 수 있는 터를 반드시 만들어야 하리라. 후대들이 기억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독립투쟁 따위를 한단 말인가. 김상옥 의사의 어머니(김점순)는 쓰러진 아들 앞에서 ‘시집 올 때 비가 그렇게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상옥이가 (빗발치는 총알 속에)죽었소’라고 했다. 억수 같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도리를 돌려드려야만 한다.  

여러 해를 거듭하면서 국치터와 남산예장공원을 기획하고 이회영기념관을 조성했다. 서울시 중구 예장동 2번지, 4번지 일대는 한국통감관저(총독관저)와 총독부 직원, 경찰, 친일파들의 관사가 있던 곳이자 중앙정보부 6국이 있던 자리다. 경술년(1910년)에 당한 국치도 같은 자리에서 있었다. 이곳에 점철된 오욕의 역사를 독립운동가들을 모셔서 조금씩 씻어내고 있는 중이다. 

자기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대중은 미래를 자기 역사로 만들 수 없다. 기록과 기억은 그저 어제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일을 온전히 살아가기 위한 투쟁이다. 망각이야말로 가장 욕스러운 자기 모욕이다. 대중의 기억은 불패의 기억이다. 기억하는 대중은 역사에서 반드시 승리하는 까닭이다. 김상옥 의사는 살아서는 가장 치열하게 싸웠고 어쩌면 지금 패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건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 

청년 김상옥이 일제 순사에게 빼앗은 칼은 어디에 있을까. 일제 식민지 지배가 욕스럽다면 기억과 기록에서라도 승리해야만 한다. 김상옥이 칼을 빼앗듯 말이다. 그 칼은 지금 독립기념관(제5전시관)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전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서울시총감독/남산예장공원 기획자

[관련기사]

서해성 작가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뒤로가기 위로가기
기사 댓글 1
전체보기
  • 별처럼바람차럼 2022-06-20 17:35:14

    우리나라학교에서는 폭력을 수반한 투쟁은 잘 안가르친다 왜 친일역사가들의 입맛에 따라 가르치기 때문이다.신고 | 삭제

    가장 많이 본 기사
    1
    尹, 공공기관 ‘방만 경영’ 지적에 하승수 “특활비나 공개하라”
    2
    이재명 “우리에겐 위기극복 DNA 있어…머리 맞대면 극복 가능”
    3
    국정원 부서장 전원 대기발령 보도에 박지원 “깜짝 놀랐다”
    4
    김창룡 청장, ‘경찰국 신설’ 등에 반발 전격 사의 표명
    5
    윤건영 “추미애vs한동훈, 尹 부하 아니라더니 너무 달라”
    6
    檢 ‘빅4’ 자리에도 ‘尹사단’ 전면배치…동아 “너무 나갔다”
    7
    장제원 주도 ‘미래혁신포럼’ 속내 분석 장성철의 ‘폭로’
    8
    尹정부, 대대적 국정원 물갈이 나서나…1급 부서장 전원 대기발령
    9
    尹 기내서 첫 기자간담회…백혜련 “비행기서 축구 봤다라니”
    10
    “원구성 기다리겠다”더니… 尹, 장관 임명 “나토 다녀와서 판단”
    go발뉴스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마포구 서교동 451-55 2층  |  대표전화 : 02-325-8769  |  팩스번호 : 02-325-8768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영우
    사업자등록번호 : 105-87-76922  |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서울 아 02285  |  등록일: 2012년 10월 9일  |  발행/편집인 : 김영우
    공식계좌 : 국민은행 090501-04-230157, 예금주 : (주)발뉴스
    Copyright © 2012 go발뉴스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alnews21@gmail.com
    저희 ‘go발뉴스’에 실린 내용 중 블로거글, 제휴기사, 칼럼 등 일부내용은 ‘go발뉴스’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