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원웅 광복회장. <이미지 출처=TBS 라이브 영상 캡처>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던진 폭탄에 일본육군대신 출신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죽었습니다. 백선엽은 얼마나 그를 흠모했던지, 시라카와 요시노리로 창씨개명 했습니다. 우리 사회 일각에는 백선엽을 ‘국군의 아버지’라고 칭송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국군의 아버지라면, ‘우리 윤봉길’ 의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친일반민족권력 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일제 때 못지않은 탄압을 받았습니다. 고문, 투옥 심지어 학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재판정에서는 법복 입은 친일파 출신 대법관과 죄수복에 수갑 찬 독립운동가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이 죄가 되는 세상에서 그 후손들이 어떻게 잘 살 수 있었겠습니까? 친일파들은 대대로 떵떵거리며 살며,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지금도 가난에 찌들어 살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혹독한 ‘불공정’이 있을까요?”

15일 김원웅 광복회 회장의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 중 일부다. 김 회장은 이날 기념사에서 “촛불혁명으로 친일에 뿌리를 둔 정권은 무너졌지만 이들을 집권하게 한 친일반민족 기득권 구조는 아직도 철의 카르텔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며 “친일파 없는 대한민국, 이런 대한민국을 만들고 싶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김 회장이 ‘친일파 척결’을 천명하는 과정에서 일부 뉴라이트 및 극우보수 세력이 ‘국군의 아버지’로 칭송하는 고 백선엽 장군을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다. 이에 앞서 김 회장은 역대 이승만 정권부터 박근혜 정권 등을 친일에 뿌리를 둔 정권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우리 국민은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친일정권과 맞서 싸웠습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친일정권은 무너졌고, 국민저항의 정점에서 박정희 반민족 군사정권은 자체 붕괴되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6월 항쟁에 무릎 꿇었고, 박근혜 정권은 촛불혁명으로 탄핵되었습니다.

국민들은 친일에 뿌리를 둔 역대정권을 무너뜨리고, 또 무너뜨리고, 또다시 무너뜨리고… 처절하지만, 위대하고 찬란한 투쟁의 반복된 승리로, 이렇게 우뚝 선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역대 어느 광복회 회장의 광복절 기념사와 비교해도 도발적이고 선명한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국민의힘과 대선주자들이 격한 반응을 쏟아내며 김 회장을 비판하고 나섰다. 비판의 수위도 김 회장의 기념사 못지않았다.

▲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제76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사전녹화 된 김원웅 광복회장의 기념사를 본 후 박수를 치고있다. <사진제공=뉴시스>

발끈한 국민의힘과 유력 보수 대선주자들

“제76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은 왜곡된 역사관을 토대로 정치적 중립의무를 저버린 채 제멋대로의 막무가내 기념사를 내보냈다. 대한민국의 과거를 친일을 극복하지 못한 잘못된 역사로, 현재의 대한민국은 친일파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등 구구절절 얼토당토 않은 기념사를 진행했다. 철 지난 이념과 극도로 편향된 역사관이 전제된 채 대한민국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기념사로 평가한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기념일인 광복절 기념식을 자기 정치의 장으로 오염시킨 김 회장은 즉각 사퇴해야 한다. 물론 매년 반복되는 김 회장의 망언을 방치하여 국민 분열을 방조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근본적 책임이 있다.” (15일 국민의힘 신인규 상근부대변인 논평 중)

이렇게 김 회장의 기념사를 막무가내식 망언으로 규정한 국민의힘은 대통령 책임론을 제기했다. 신 부대변인은 “문 대통령은 광복회의 국민 갈라치기 행태를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국가보훈처를 통해 광복회장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며 “문 대통령이 이를 지속적으로 방조하고 용인한다면 분노한 국민들은 이제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다. 문제를 회피하지만 말고 제발 책임있는 대통령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주기 바란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대선주자들도 김 회장 비판에 가세했다. 같은 날 윤석열 전 검찰총장 측 김병민 대변인은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궤변과 증오로 가득찬 김원웅 광복회장의 기념사 내용이 사전에 정부 측과 조율된 것이라 하니, 이 정부가 광복절을 기념하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무엇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며 “문재인 대통령과 집권당의 책임 있는 정치인들이 이제라도 분열과 증오의 정치를 멈추기 위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서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같은 날 중앙일보의 <‘총독부 법통’ 보수 모욕 김원웅 기념사, 정부와 조율했다> 기사를 근거로 역시나 문 대통령 책임론을 제기한 것이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 측 특보단도 논평을 내고 “대부분 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됐던 이승만 내각은 억지로 폄훼하면서 북한의 친일내각에는 입을 다무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따졌다.

이에 대해 공보단은 “김원웅은 2018년 12월 서울명동 향린교회에서 열린 ‘위인맞이 환영단’ 행사에 참석했다”라며 “북한 김정은을 위인이라고 떠받드는 행사에 참석한 그는 ‘박근혜를 좋아한다는 사람보다 김정은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훨씬 개념 있어 보인다’며 ‘친일의, 친일에 의한, 친일을 위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고 주장했다”며 과거 김 회장의 발언을 끄집어냈다.

아울러 유승민 ‘희망 캠프’의 권성주 대변인은 “김원웅 회장의 발언인가 대통령의 발언인가”란 논평을 통해 아예 대통령 배후설을 전면에 내세웠고, 원희룡 제주지사 또한 “당신의 지긋지긋한 친일 팔이, 당신들의 최소한의 염치도 없는 내로남불, 문재인 정권의 국민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이념 망상이 이 뜻 깊은 광복절을 더 욕보이고 있는 것”이라며 거친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제76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난데없는 대통령 책임론

광복회 회장이 광복절 기념사를 통해 ‘친일파 척결’을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런 스탠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년에 한 번 가장 주목을 받는 광복절을 맞아 가장 선명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이번 경우처럼 국민의힘과 당 내 유력주자들이 발끈하는 메시지 말이다.

반면 김 회장의 주장이 역사의 정치화라는 역사학자의 반박도 없지 않았다. 같은 날 심용환 역사학자는 장문의 페이스북글을 통해 “참 난감하다. 역사의 정치화를 언제까지 지켜보아야만 할까. 이것이 작금의 상황에 도움이 된다고 정말로 믿는 것일까?”라며 이런 반론을 제기했다.

“김원웅 광복회장의 논리는 너무나 단순해서 반박하기조차 뭐한 수준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친일파,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이 모두 한 계보 속에서 내려왔다는 말인데 도대체 무슨 역사적 연구를 근거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이승만 정권기 친일파 처단 실패와 친일파의 사회적 정착 과정에 관하여는 여러 연구가 있다. 그런데 이들 세력이 4.19혁명 때 무너진 과정. 그리고 과거 전쟁기 때 부일 협력에 적극적이었던 박정희 등과 ‘같은’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사실 김원웅 회장의 기념사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고 백선엽 장군을 거론, 정치적인 도발을 감행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역대 정권들이 ‘친일 정권’인가 하는 점은 진지한 토론이 이뤄져야 할 주제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 회장의 ‘도발’이 정치적인 것은 맞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이 정도 ‘역사의 정치화’에 불편해하는 것을 넘어 ‘대통령 책임론’ 운운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것은 자백일까 고백일까.

하성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