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쩌다가 국군 장병 55만 명분의 백신을 미국으로부터 원조 받았다고 감읍해 하는 나라가 되었나? 개념 없는 정치야, 무능한 정부야, 비겁한 전문가들아! 이것은 자화자찬할 성과가 아니라 부끄러워하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

지난달 23일 권영진 대구시장이 페이스북에 게시한 ‘부끄러운 우리의 백신 자화상’이란 글이다. 이처럼 55만 명분 백신 원조라는 한미정상회담 결과를 두고 미 바이든 대통령은 물론 정부 및 전문가들까지 싸잡아 비판한 권 시장은 같은 날 오후 ‘백신에 관한 한 아닌 건 아닌거다’라며 재차 정부를 공격했다. 

▲ <이미지 출처=권영진 대구시장 페이스북 캡처>

“나라를 지키는 군 장병들이 맞을 백신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우리 대통령이 미국까지 가서 얻어 오는 것이 자랑해야 할 일인가? 부끄러워하고 반성해야 할 일이지. 그런데도 정부와 여당은 방미 성과를 자랑하기에 급급하고, 야당 정치인 중에도 자기가 역할을 한 것처럼 공치사하는 분도 있다. 과거에 백신 접종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떠들던 전문가란 양반들도 방송에 나와서 앞뒤 다른 얘기를 한다(...). 

우리나라 백신 방역은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해 있다. 하나는 수급 부족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적 불신이다. 두 가지 모두 정부의 책임이다. 백신 수급이 늦었고 부족한 것은 사실 아닌가. 그래서 1차 접종을 한동안 중단할 만큼 접종 전선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도 방역 당국은 문제가 없이 잘되고 있다고만 한다. 국민은 납득할 수 없다. 정부에 대한 불신은 백신 접종에 대한 불신과 거부로 이어지고 있다. 현장에서는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쉽지 않아서 걱정이다.”

권영진 대구시장의 무리수 

전형적인 침소봉대다. 이때조차도 왜 대구가 백신 접종률이 꼴찌인지를 고민했어야 옳다. 그래서였을지 모른다. 권 시장이 비정상적인 루트로 ‘화이자 백신 3천만명분 도입’을 추진해던 이유가. 

이때까지만 해도 권 시장은 “이제부터라도 정직하게 국민들에게 다가갔으면 한다”며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부족한 것은 부족했다고 인정하고,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발전도 있고 국민의 신뢰도 회복될 수 있다”고 현 정부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마치 믿을 구석이 있다는 것처럼.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만 해도 독일의 제약사와 접촉하며 정부에 대구시 차원의 백신 도입을 건의했을 때라고 볼 수 있다. 

권 시장의 큰소리가 그에서 비롯된 자신감의 결과일 수 있다는 얘기다. 정작 실상은 어땠나. 문자 그대로 나라망신 시킨 꼴 아니었나. 혈세까지 낭비할 뻔 한 건 물론이고(☞관련기사 : “권영진, ‘백신 논란’ 전말 국민 앞에 소상히 밝혀야”). 이를 두고 4일 <민중의 소리>는 <대구시장의 설레발 백신 별도 도입 발표, 불신만 키웠다>에서 이렇게 꼬집었다. 

“권영진 시장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검증되지 않은 백신 도입 루트를 공개적으로 밝힌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렇게 설레발 행정으로 사회 혼란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 해외언론에 토픽감으로 소개되는 망신은 그렇다치고 백신 접종에 오히려 독이 되는 최악의 행정이었다. 확보된 백신부터 제대로 접종받을 수 있도록 대구시민의 불안감을 불식시키는 데 주력하는 것이 권영진 시장이 할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구시의 ‘백신 사기’에 비난이 쏟아지던 3일 오후 권 시장은 ‘국가균형발전은 반드시 실현해야할 국가정책입니다’란 페이스북글을 통해 딴소리를 늘어놨다. 소셜 미디어 상에서는 비난이 득세한 가운데 대구시의 자체 백신 도입 시도가 권 시장의 중앙 정계 진출을 염두에 둔 무리수라는 지적까지 쏟아졌다.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우려를 담은 대구시민들의 ‘부글부글’원성 또한 만만치 않다.  

이런 권 시장의 무리수는 우선 본인의 정치적 욕망에서 비롯됐을 공산이 적지 않다. 아울러 그 무리수의 배경에 ‘백신 공포’의 바탕이 된 ‘기승전-반문재인’이란 진영 논리를 권 시장이 적극 활용했을 거란 짐작도 어렵지 않다. 

▲ <이미지 출처=MBC 화면 캡처>

코로나19 팬더믹 초기 신천지 사태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은 대구경북 지역의 낮은 백신 접종률은 지역 내 팽배하고 공고한 정부 불신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권 시장이 한미정상회담 직후 “개념 없는 정치야, 무능한 정부야, 비겁한 전문가들아”라고 일갈한 배경에 백신 자체 도입으로 이러한 백신 공포를 일거에 불식시키고 중앙정계에 도전하겠다는 정치적 욕심이 깔려 있지 않았을까.  

전제가 잘못됐으니 해법도 엉뚱한데서 찾을 수밖에. 권 시장은 앞선 페이스북글에서 “비판하는 사람을 몰아세우고 잘못이 없다고 우기거나 자화자찬만 한다고 사실이 달라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썼다. 

틀렸다. 현재 방역당국의 백신 접종 정책이나 속도는 결코 자화자찬일 수 없다. 대만 TV로부터 ‘저러지 말자’라고 조롱을 받은 권 시장의 진단 자체가 잘못됐다. 백신 물량은 물론이요 고령층 일반인의 접종 시작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접종 인구 비율이 올라가는 중이다. 

정부의 대응 역시 마찬가지다. 비판하는 사람을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비판을 바로잡는 것일 뿐이다. 이런 현실에 어두웠으니, 아니 현실을 적확하게 진단할 생각조차 없었으니 ‘백신 공포’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얄팍한 술수를 부리다 ‘백신 사기’에 휘말려든 것 아닌가. 

▲ 대만 민영방송인 '민시TV'가 3일 권영진 대구시장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이미지 출처=페이스북 캡처>

‘태세전환’ 자랑스레 알린 ‘조선’

<조선일보>에 배우시라. 지난달 26일 고령층 일반인 백신 접종과 다음날 잔여백신 예약 접종 시작과 함께 ‘백신을 맞읍시다’란 캠페인을 통해 극적인(?) 태세전환을 이뤄낸 그 <조선일보> 말이다. 세간의 눈길을 의식한 듯, 4일 <조선일보>는 ‘백신 접종이 정파 따질 일인가’란 박은호 사회정책부장의 ‘태평로’ 칼럼을 통해 “백신 접종이 본격 시작되기 전에 국민이 우려하는 안전성, 효능 문제를 검증하는 것은 언론의 할 일”이라며 태세전환의 배경을 설명했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안전성, 효능 논란은 유럽 각국에서 먼저 제기됐다. 혈전 문제가 불거지고, 임상 설계가 미흡했던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각국 정부는 처음엔 접종 제한 대상을 65세 이상으로 잡더니 나중엔 30세 미만 또는 40세 미만으로 정반대로 바꾸는 등 혼선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극히 드문 혈전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1초라도 빨리 백신을 접종하는 것이 낫다는 사실이 과학적 연구를 통해 명백해졌다. WHO 같은 국제기구들도 같은 입장이다.

보수 일각에서도 ‘조선일보가 왜 이러나'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백신을 접종받자고 말하면 문재인 정권을 도와주는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백신은 과학이다. 선진국 국민들은 백신을 맞고 나서 감염 공포에서 속속 벗어나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오히려 독자들에게 더 빨리 백신을 맞자고 제안 드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 안전이 정파나 편가르기에 휘둘릴 수는 없다. 필자는 지난 6개월 코로나 취재 담당 부장으로 일하며 ‘과학이 이긴다’는 말을 받들어왔다. 온 국민이 코로나 공포로부터 벗어날 때까지 과학과 상식을 맨 앞자리에 둘 것이다.”

▲ <이미지 출처=조선일보 홈페이지 캡처>

‘백신 사기’에 휘말린 권 시장은 상상도 못할 노회함 아닌가. <조선일보>는 한술 더 떠 “그런데 조선일보 보도에 대해 딴지를 거는 듯한 얘기들이 들린다”며 “‘백신 불안을 부추기더니 접종 독려로 선회했다’ ‘대선 국면을 앞두고 집단면역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미리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모더나 백신을 위탁 생산하기로 해서 백신 불안감을 부추기는 보도를 줄였을 것’이라고 한다”며 세간의 의혹을 공표해 버렸다. 

권 시장이 애호할 듯한 <조선일보>가 말했다. ‘백신은 과학’이라고, ‘과학이 이긴다’고. ‘과학과 상식’을 맨 앞자리에 둘 것이라고. ‘조선’의 ‘태세전환’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늦더라도 최소한의 상식을 탑재할 때란 얘기다. 국민 생명과 안전을 볼모로 자기 정치, 제 이익을 추구한 이의 결말을 권 시장 스스로 입증하지 않았는가. 

하성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