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은 한글이다>
-한글날에 정세권을 기리며

한글날은 ‘한글의 날’이 아니라는 기쁨으로 맞는다. 
왜말 흔적이 없는 깨끗한 이름, 
세상에 없는 글자 명절 한글날. 

한글날에는 정세권을 생각한다. 
세종은 한없이 높아
대님 질끈 동이고 북촌 골목 돌층계를 오르는 중씰한 사내면 족하다. 

오늘은 식민지 조선에서 번 돈을 몽땅 한글에 바친 한 사내를 섬긴다. 
화동花洞에 우뚝한 조선어학회 건물을 지어 바치고 
나랏말씀이 왜말과 달라 
우리네 얼이요 넋이자 표상이요 생활임을 기업으로 일깨운
그 이름으로 새벽을 맞는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서른세 명이 굴비로 엮여 끌려갈 때 
학자가 아닌 오직 한 사람 정세권이 포승 사이에 있었다. 

정세권은 북촌을 지어 돈을 모았다. 
북촌은 모조리 정세권의 영토다. 
경상도 고성 사람 정세권은 
밀려오는 왜인들 공세에 맞서 
두 궁궐 경복궁 창덕궁 사이를 
한옥 처마와 처마로 빼곡히 잇대어 채웠다. 
거기서 번 돈은 다 한글이 되었다. 
북촌은 한글의 영토다. 

일제 경찰서 지하실 고문 끝에 땅을 빼앗기고
건양사建陽社 기업이 다 망하고 난 뒤에도
한글은 남아서 북촌으로 저렇게 서 있다. 
저것이 정세권이다. 
북촌과 한글은 하나다. 
북촌과 한글은 저항으로 하나다. 

한글날에는 화동 골목에서 북촌을 향해 걸을 일이다. 
북촌에서 빗소리는 백년 동안 한글 자모음으로 떨어진다. 
정세권이 처음 한옥 지붕 끝에 함석을 붙인 까닭이다. 
한옥 미닫이를 열 때면 지금도 
너른 이마에 미간이 먼 팔자 눈썹
서글서글한 눈매 아래 거뭇한 카이제르 콧수염
늘 한복 입은 그 어른이 창유리 너머에서 무심히 중얼거린다. 
북촌은 한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