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에어컨>

아버지의 에어컨은 보일러를 닮았다. 
어머니의 보일러는 에어컨을 닮았다. 

아버지는 더위를 잘 타지 않았다. 
어머니는 추위를 덜 타는 편이었다. 

우리집 에어컨은 여름 내내 고장나 있기 일쑤였다. 
우리집 보일러는 겨울이면 자주 말썽을 부렸다. 

다만 손님이라도 올라치면 이상하게도 에어컨이 잘 돌아갔다. 
문득 시집간 누나가 찾아오면 보일러가 뜨끈하게 작동했다. 

우리집 에어컨은 보일러를 닮았다. 
우리집 보일러는 에어컨을 닮았다. 

나도 더위를 덜 타고 추위를 잘 타지 않는 나이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에어컨을, 어머니의 보일러를 고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에어컨이 보일러를 배워갈 때
보일러가 에어컨을 익혀갈 때

에어컨보다 추운 겨울날 보일러 단추에서 아버지를 만났고
보일러보다 더운 여름날 에어컨 단추에서 어머니를 뵈었다. 

여름이 가기 전에 
몇 번이나 더 가난한 에어컨은 아버지를 닮아갈까. 

봄이 오기 전에
헐벗은 보일러는 몇 밤이나 더 어머니를 닮아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