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실제의 이야기다. 실제의 역사다. 신화가 아니다. 여전히 우리 핏속에 생생히 흐르는 가슴 뜀의 연유와 이 원초적 감각의 발상지에 대한 기억의 반추일 뿐이다. 오래된 기억이라 해서, 기억이 아닐 리는 없다. 아무리 오래됐다고 해도 우리들의 피는 선연히 기억한다. 여전히 가슴이 뛴다. 여전히 목이 멘다. 마음대로 가 볼 수 없기에 더더욱 그립기만 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살던 고향은>(감독 류종헌, 제작 후즈닷컴, 배급 시네마달)은 우리가 고구려인의 후예라는 긍지를 되살려준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지난해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한 과정을 담은 95분짜리 영화다. 도올 선생은 단언한다.

“우리는 고구려를 보고 들으면, 심장이 뛰고 맥박이 뛴다. 14억 중국 인구 중 누가 고구려 얘기를 들으면 가슴이 뛰랴? 그러나 우리는 고구려 얘기를 들으면 심장이 뛰고 눈물이 난다. 우리의 (신라 중심의 지금의)역사는 깔때기로 점점 작아지고 좁아지다 못해 실 한 올 빠져나갈 틈 밖에 없는, 협소한 역사관만 남았다. 우리는 우리를 상당히 왜소하게 바라봐 왔다. 신라중심사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편협하다는 것이다.”

고도(古都)로의 여행은 상상력의 여행

뛰는 가슴이, 기록을 대체한다. 분명 그렇게 되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고구려의 ‘증거’를 못 가진 대신 그 기억을 품고 있다. 글자와 이야기로 ‘신화’를 배우기 이전에 이미 다들 꿈인지 기억인지 모를 곳에서 말달리고 활을 쏘던 자신의 몸을 선험적으로 ‘경험’했다고 느끼는 집단 기억의 공유자들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땅이 비록 너무도 멀리 있고 현재의 눈에는 아무리 ‘낯설어’ 보일지라도, 진정 심장과 혈관으로부터는 ‘고향’에 온 것만 같은 반가움에 왈칵 눈물부터 나는 게 우리다. 고향이라는 게 꼭 출생신고지만을 한정하는 게 아니라는, 이 온몸으로 외치고 싶은 항변에, 고구려 영토와 발해 영토가 들어가 있다. 거기가 진정, 우리들의 본디 고향이다.

도올 선생은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커다란 고구려 돌에 등을 기대고 누우며 그렇게 그 땅을 직접 밟는 여정을 시작한다. “고도(古都)로의 여행은 상상력의 여행이다. 우리의 고대사는 가냘픈 역사가 아니라, 인류의 보편사와 궤를 같이 하는 역사로 가야 한다.”

도올 선생이 직접 밟은 그 땅들은 일견 방치된 듯 그러나 놀랍도록 본디의 규모가 잘 보존된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주몽의 첫 도읍지 환인의 흘승골성부터 광개토왕비, 국내성, 환도성 무덤 떼, 발해의 두번째 수도 서고성 터, 흑룡사 석등 등을 보고나면 이 믿을 수 없는 ‘마주함’에 입이 딱 벌어진다. 저토록 생생할 수가! 졸본을 실제로 눈앞에 보는 감격이라니! 고구려는 실로 거대한 대제국이었다. 광활함이 무엇인지, 비로소 DNA 깊은 곳에 불을 댕기는 느낌이었다. 도올은 또 이야기한다. “역사는, 감을 잡는 것이다.” 그렇다. 감을 잡아야 역사의 전모가 느껴질 것이다. 사료는 그 ‘감’을 뒷받침하는 수단인지도 모른다. 역사는 어쩌면, 증거가 아닌 ‘근거’를 찾아 파고들어가는 깊고 깊은 동굴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신화는 말하자면, 사실을 메타포로 치환해 후손에게 전하는 절절한 기록이다. 그것만 떠올린다면,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감각은 몸이 기억해낼 것이다. 낮에는 그 하늘 그 땅과 온몸으로 만나며 도올 선생은 완연한 고구려 선현들의 품에서 감격한다. 그리고 밤에는 옛이야기 들려주듯 이 이야기를 카메라에 쓴다. 가령 ‘난생(卵生)’ 이야기는 이런 풀이를 가진다. 알에서 태어난다는 것, 이것은 부계혈통을 지우는 신화의 보편성이다. 주몽의 고구려, 북부여의 난생 신화는 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의 환치다. 말하자면 ‘신화적 양상’을 띠고 있을 뿐, 이것은 신화가 아니라 (엄연한)사실인 것이다. 도올의 목소리가 감동으로 떨린다. “고구려 역사를 현실로 보지 않고 그동안 내가 진정 신화 속에 살았구나! 현실이 아니라! 내가 그걸 몰랐구나!” 그리고 이어서 파격적 제안을 한다. “조선 역사를 북부여로부터 내려다보자.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자!”

한반도 지도를 거꾸로 놓고 ‘다시’ 보자!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는 경험, 이전까지는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그 광경이 갑자기 모든 ‘생각’을 바꿔놓기 시작한다. 반도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 끝없이 대륙으로 퍼져나가는 땅줄기의 중심으로서의 한반도. 아, 우리는 한반도 말단에 갇힌 민족이 결코 아니었다! 한반도는 대륙과 이어진 남쪽의 ‘심장’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험한 지형 속에 숨어있는 천혜의 요새와 벌을 찾아내, 안락한 도시를 건설하곤 했다.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탁월한 지형이었다. 환도성 연화지 앞에서 너른 평원에 펼쳐진 무덤 떼를 보는 순간, 뭔가를 초월해버리는 느낌마저 든다. 4700여기의 지구상 최대의 웅장한 분묘기. 그 앞에서 도올과 일행은 ‘삼배로는 모자라 오배’를 정성스레 드린다.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보존된 역사”인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고구려 역사가 ‘누구의 것’인지가 기실 ‘동북공정’의 알맹이라면, 질문은 이 한 줄로 요약된다. “이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누가 계승했는가?”

광개토대왕비는 높이 7미터의 ‘진짜로 있는’ 돌비석이었다.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장애요인들이야 여전하지만, 비석은 처음 세워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땅들을 접하고 나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우주의 중심은 중원이 아니라 동북이었다. 고구려의 천도는 그 중심을 확고히 찾아내고 나라를 다지는 일이었다. 그 고구려의 땅을 발해가 이어받았다. 그리고 독립투사들이 기반으로 삼았다.

“발해인들은 영하 20도의 벌판에서 뼈를 치며 들어오는 추위를 견디며 얼마나 용감하게 살았는지! 저 추위 속을 걸어간 독립투사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일본 토벌대는 언제나 한겨울에 토벌했다. 독립군의 그 하루하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눈물겨운 것이었다.”

“역사는 감이다. 역사는 성원들의 주체적인 이매지네이션(Imagination)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게 우리 민족의 태극이다. 발해인들은 이 벌판에서 자신들이 태극 소용돌이의 중심축에 있다는 생각을 일상으로 했을 것이다.”

그 말이 흘러나오는데, 화면에서는 검푸르게 져가는 달과 붉게 떠오르는 해가 하늘에 동시에 떠 있었다. 공존과 교차의 하늘이었다. 발해인들이 일상으로 보았을 우주였다. 우리의 조상들은 그 광활함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긴 채 겸허하게 살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너무도 좁은 ‘곳’에 갇혀 살았다. 이 광활함, 이 광대한 꿈이 면면히 흐르고 있었기에, 우리는 세계 유일의 유니크한 아이덴티티를 지킬 수 있었다.”

그 땅이 우리에게 전하는 진정한 역사다. ‘고구려인’ 김용옥은 선언한다. 우리가 바로 고구려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이제, 덧붙이는 말을 써야 할 차례다. 나는 도올서원 재수(齋秀)다. 학창시절, 평소에는 학교를 다니고 방학에는 도올서원을 다녔다. 도올서원에서 몇 번의 여름과 겨울을 난, 도올 선생님의 제자다.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뿐 아니라 사석에서도 도올 선생님의 수많은 생각과 말씀을 익히 들었다는 뜻이다.

2012년 연말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이라는 이름의 TV쇼를 보고나서, 나는 밤새도록 울었다.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개표방송 시작과 거의 동시에, 뭔가 눈앞에서 뻔히 보고 있으면서 빼앗기고 만 듯한 기묘한 통증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갔다. 우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 도올 선생님의 책 <사랑하지 말자>를 겨우, 찾아내 읽었다. ‘우리’라고 이름 붙은 모든 것에 대해, 차라리 ‘사랑하지 말자’고 다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날들이었다. 이 갈 곳 없는 사랑이 모멸감과 자기혐오로 뒤바뀌는 것을 보느니, 이대로 얼려버리고 싶었다. 선생님의 쓸쓸한 옷자락을 부여잡고 섧게 울고 싶었다.

올 11월의 광화문에서, 이 봉인은 완전히 풀렸다. 2차 민중총궐기 무대에 홀연히 올라오신 도올 선생님을 보았다. “천명(天命)이 이미 박근혜를 떠났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그분의 쩌렁쩌렁한 육성을 들었다. 그리고 그 주말이 지나간 뒤의 아침, 고발뉴스에 단독으로 올라온 도올 선생님의 20여분짜리 육성파일을 들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가슴이 콱 막혔다. 한 줄 한 줄이 다 가슴을 벅차게 했다. 이제, 사랑해도 될 시간이었다. 그리고 백만 개의 촛불이 어둠을 사르며 타오른 우리 헌정사상 초유의 광장에, 나도 있었다. 우리가 뜨겁게 모여든 이유는 오직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할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흐르는 눈물을 굳이 닦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도 너도 같은 이유로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그 일렁이는 불꽃같은 마음이 수백만 개였다. 그래서 하나의 마음이었다. 우리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한다는 이 확인은, 꿈이 아니었다.